노래와 이야기
사람은 평생 두 번 태어난다고 합니다.
한 번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한 번은 무엇일까요?
그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특별한 인연으로 태어납니다. 예를 들면, 굶주려 죽어가는 목숨에 밥 한 그릇 건네준 사람의 손끝에서 말이죠.
이곳, 경기도 외곽의 수라나루터에는 조금 특별한 모자가 살고 있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그 누구보다 뜨거운 '기른 정'으로 묶인 두 사람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동이 트기 전, 수라나루터의 공기는 칼날처럼 차갑고 날카롭습니다.
모두가 잠든 시각, 가장 먼저 불을 밝히는 곳은 강가 끝자락에 있는 작은 국밥집입니다.
“오늘도 무사히... 그저 배고픈 이들의 속이나 따뜻하게 해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국밥집 주인 한정심은 매일 새벽, 가마솥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립니다.
그녀의 손은 이미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있습니다.
뜨거운 김에 데이고, 무거운 솥뚜껑을 만지면서 생긴 굳은살 자국들이 훈장처럼 박혀 있죠.
오늘 아침에도 정심은 솥뚜껑을 열어 육수의 상태를 살핍니다. 밤새 고아낸 뼈 국물이 뽀얀 우윳빛을 내며 보글보글 끓어오릅니다.
이때, 방에서 누군가 나온 인기척이 들립니다. 열두 살 소년 도윤입니다. 도윤이는 말없이 정심의 곁으로 다가와 땔나무를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도윤아, 일어났느냐. 조금 더 자지 않고.”
아이는 대답 대신 정심을 향해 살며시 미소만 지어 보입니다.
나루터 사람들은 도윤을 '수라나루의 벙어리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열 살이 넘도록 입 한 번 떼지 않은 아이. 하지만 정심은 알고 있습니다.
이 아이의 침묵이 장애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지켜야할 처절한 약속이라는 것을요.
해가 중천에 뜨자 나루터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정심의 국밥집에도 손님들이 찾아들기 시작합니다.
도윤은 쟁반을 들고 노련하게 국밥을 나릅니다. 누군가 아이의 발을 걸어 장난을 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뜨거운 국물이 손등에 튀어도 아이는 신음 한마디 내지 않습니다.
“야, 이 녀석아! 벙어리면 눈치라도 빨라야지!”
술취한 사내의 거친 농담에도 정심은 그저 허리를 굽히며 웃어넘깁니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아이가 워낙 숫기가 없어서요. 여기 고기 한 점 더 넣었으니 노여움 푸십시오.”
사실 이럴때마다 정심의 가슴은 미어집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대신해 싸워줄 수 없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것, 그것이 10년 전 눈보라 속에서 건져 올린 이 아이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정심은 도윤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발견합니다.
문틈으로 들여다본 방 안, 도윤은 붓 대신 아직은 덜 탄 숯을 들고 바닥에 글자를 적고 있습니다.
‘나라 국(國), 백성 민(民)...’
천자문을 가르친 적도 없는데, 아이는 나그네들이 버리고 간 종이 조각을 모아 스스로 글을 깨치고 있었습니다. 정심은 그 모습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낍니다.
‘안 된다, 도윤아. 그 지혜가 너를 죽일 화근이 될 게야. 너는 그저 나루터 과부의 모자란 아들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네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있어.’
정심은 방으로 들어가 도윤이 바닥에 적어둔 글자들을 치맛자락으로 거칠게 지워버립니다.
아이는 정심의 이런 반응이 늘 서운하기만 합니다.
“도윤아, 내 말 똑똑히 들어라. 글을 알면 죽는다. 남들보다 잘나 보이면 죽는 게야. 너는 언제나 나보다 더 멍청한 놈이 되어야 한다. 알겠느냐!”
아이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집니다.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소리 없는 울음이 방안을 가득 채웁니다. 정심은 아이를 품에 꼭 안습니다.
이 작은 몸 어디에 그런 비범함이 숨어있는지 정심은 늘 놀랍기만 합니다.
하늘은 왜 그리도 무심한지, 결국 이들 모자에게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나루터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릅니다. 가죽신을 신은 외지인들이 주막거리를 어슬렁거립니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관청의 상징을 알려주는 패가 달려 있습니다.
“여보시오, 주모. 이 근방에 열 살 조금 넘은 사내아이가 있소?”
정심은 순간 온 몸의 신경이 멎는 듯 했습니다
“글쎄요... 이곳엔 워낙 뜨내기들이 많아서요.“
그녀는 떨리는 손을 앞치마에 숨기며 고개를 젓습니다.
낯선 그 사내들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마당에서 마른 장작을 패고 있는 도윤을 발견합니다.
“혹시 귀한 집 자제처럼 보이는 아이 말이오.”
정심은 심장이 귀 밑까지 울라온 것처럼 온 몸이 쿵쾅거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 저기 우리 집 아들놈이 하나 있긴 한데, 보시다시피 벙어리에다가 머리도 좀 모자란 녀석입니다.”
정심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사내들은 도윤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그때, 사내 중 한 명이 도윤의 곁으로 다가가 아이의 어깨를 툭 칩니다. 도윤은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옆으로 내려둔 채 멍한 표정으로 침을 흘리는 시늉을 하며 사내를 바라봅니다.
사내들이 멀어지자 정심은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뱉습니다. 하지만 안도의 순간은 짧았습니다. 사내들이 지나간 자리, 국밥집의 나무로 된 담벼락에는 나뭇가지가 하나 꺾여 있었습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일까요. 정심은 직감합니다. 10년 동안 공들여 쌓아온 모래성이 무너지려 하고 있다는 것을요. 이제 그녀는 선택해야 합니다.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목숨을 걸고 이 아이를 품을 것인가.
수라나루터에 다시 차가운 안개가 밀려옵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정심의 국밥집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습니다.
[삽입된 노래는 유튜브 '가락야담'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Garak_Yad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