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있는 이야기
담벼락의 꺽여진 나뭇가지는 역시 바람의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사자가 이 집 대문을 넘었다는 선전포고였습니다. 정심은 새벽부터 웅덩이의 물을 길어와 그 표식을 지우고 또 지웁니다. 하지만 붉은 안료는 마치 억울하게 죽은 이의 핏자국처럼, 닦아낼수록 더 넓게 번지며 집안을 집어삼킬 듯 붉은 빛을 내뿜습니다.
“안 된다... 이대로는 안 돼. 내 자식 숨소리 하나도 저들이 듣게 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정심의 혼잣말이 서리 낀 공기 속으로 흩어집니다. 그녀는 직감합니다.
10년 전, 눈보라 속에서 아이를 안고 도망치던 그 지독한 사투가 다시 시작되었음을요.
그날 오후, 수라나루터 시장통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납니다. 최판석의 하수인들이 나물을 팔러 나온 어린아이를 발로 차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바구니는 엎질러졌고, 흙먼지 묻은 나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때 쩌렁쩌렁한 호통의 소리라 시장통에 울려퍼집니다.
"최판석 대감네 산에서 나물을 캤으면 대감님께 세금을 내야할 거 아냐.”
아이의 아비로 보이는 사내가 아이를 몸으로 감싸안으며 대신 맞습니다
“나라에 세금을 내고 있는데 어찌 사사로이 최판석 대감께 또 돈을 내야한단 말이오?”
“이 놈이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거 보소. 여기선 최판석 대감이 나랏님인거 모르냐? 돈을 내기 싫으면 노비로 들어오면 되지 않느냐”
하수인들은 아비와 아이 모두에게 발길질을 더욱 심하게 했습니다
“그만두시오! 죄 없는 아이를 핍박하는 것은 국법으로도 엄히 금지된 일이 아니오!”
순간, 시장터의 모든 소음이 멈춥니다.
소리가 난 곳을 보니 국밥집 정심의 벙어리 아들 도윤이 서있습니다. 늠름한 모습이 평소의 그 벙어리 도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평소라면 고개를 숙이고 먼 길을 돌아갔을 도윤이었습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아이의 눈망울을 본 순간, 10년 동안 억눌러왔던 소년의 의지가 터져 나옵니다.
게다가 벙어리인 줄만 알았던 국밥집 아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시장통의 투박한 사투리가 아니었습니다. 기품 서린 사대부의 언어, 그리고 상대의 기를 꺾는 날카로운 논리였습니다.
멀리서 국밥 배달을 가던 정심의 손에서 쟁반이 떨어집니다. 놋그릇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집니다. 정심은 보았습니다. 군중 속에 섞여 도윤의 눈빛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가죽신 사내들의 번뜩이는 눈을 말이죠. 감추려 했던 아이의 비범함이, 그 영특함이 결국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아이의 목을 겨누게 된 것입니다.
그날 밤, 정심의 국밥집엔 촛불 하나 켜지지 않았습니다. 정심은 어둠 속에서 도윤의 낡은 등짐을 쌉니다. 해진 옷가지 몇 벌과 주먹밥 두 덩이, 그리고 아이가 아끼던 꺾인 나무 숟가락 하나가 전부입니다. 정심은 아이를 향해 태어나 처음으로 가장 모진 표정을 지어 보입니다.
“지금 당장 떠나거라. 그리고 이 집 근처에도 오지 마라. 너 같은 재수 없는 놈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어미의 발치를 내려다봅니다. 아이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미의 이 독설이 자신을 사지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려 보내려는 마지막 몸부림이라는 것을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신 글을 읽지도, 입을 열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도윤의 애원에도 정심은 아이의 손목을 거칠게 뿌리칩니다. 방바닥을 짚은 도윤의 손끝에 아까 싼 짐 꾸러미가 걸립니다. 정심은 눈물을 삼키며 아이의 등을 문밖으로 떠밀어냅니다.
‘도윤아, 나를 원망해라. 차라리 나를 잊어라. 네가 더이상은 이 나루터 과부의 벙어리 아들로 살아갈 수 없겠구나. 오늘 찾아온 저 무시무시한 칼날들이 너를 비껴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도윤은 부러진 숟가락을 가슴팍에 꽉 쥔 채, 어둠 속으로 한 발짝씩 물러납니다. 정심은 닫힌 문고리를 부여잡고 소리 없는 통곡을 내뱉습니다.
하지만 정심이 미처 몰랐던 사실이 있습니다. 아이를 보낸 숲길 어귀마다 이미 횃불들이 하나둘 피어오르고 있었다는 것을요. 도윤을 쫓는 그림자는 이미 아이의 뒤꿈치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습니다.
정심은 과연 아이를 무사히 탈출시킬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녀가 내린 이 단호한 결단이 오히려 더 큰 비극의 시작이 될까요? 나루터 너머에서 들려오는 거친 말발굽 소리가 정심의 심장을 죄어옵니다.
[삽입된 노래는 유튜브 '가락야담'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Garak_Yad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