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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추 Jun 19. 2023

창비 아저씨

기억 속 이야기 8

문창과에 입학해서 교수님보다 자주 만나는 분이 있었으니, 계간지 『창작과비평』(이하 ‘창비’)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이었다. 당시 ‘창비’는 문창과에서 바이블로 여겨지던 때였다. 그에 견줄 만한 계간지로 『문학과지성』이 있기는 했지만, 리얼리즘 쪽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던 80년대와 90년대 초반 학번들에게 ‘창비’는 문학적 지향점이었다.


(계간지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에 대해서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공연영상창작학부 문예창작전공 이승하 교수의 블로그에 있는 다음 글을 소개합니다.)

https://blog.naver.com/shpoem/223041130705


문창과 복도와 주변 잔디밭을 어슬렁거리며 ‘창비’ 영인본(1966년 1호부터 1988년 62호까지 ‘창비’를 총 30책으로 제본한 것)을 판매하던 그분을 우리는 ‘창비 아저씨’라고 불렀다. 창비 아저씨의 주요 고객은 이제 막 문학의 길에 들어선 신입생들이었다. 문학도가 ‘창비’ 안 읽으면 글을 쓸 수 없다, 문창과 모든 선배들이 한 질씩 다 가지고 있다, 책값은 부담되지 않도록 할부로 내면 된다는 것이 창비 아저씨의 단골 멘트였다. 


실제로 많은 선배들 자취방 책장에 창비 아저씨가 판매하는 영인본이 꽂혀 있었고, 나도 문창과 학생이라면 ‘창비’를 창간호부터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접했던 ‘창비’ 1992년 봄호를 읽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한 권 읽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수록된 시와 소설을 제외하고 앞부분의 시론(時論)을 비롯해 문학론, 비평 등은 몇 번을 읽어도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권 읽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62권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동기들 사이에서 ‘창비 아저씨’로 불리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창비 아저씨처럼 양복바지(당시 말로 기지바지)를 입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굵직한 목소리 톤이라든지 약간의 노안(老顔)이라든지 몇 가지 이유가 더 결합되었을 것이다. 양복바지를 주로 입고 노안이라는 비슷한 요건을 갖추었으나 그가 먼저 창비 아저씨로 불린 까닭에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별명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창비 아저씨보다 더 만나기 어려울 만큼 학교에서 눈에 띄지 않았고, 말도 많이 하지 않아서 그와 오랜 시간 대화한 동기들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문창과에 몇몇 존재하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말이 통하지 않는 외골수는 아니었다. 가끔 만나면 농담도 주고받고 호탕하게 웃기도 하는 같은 또래 대학생이었다. 비슷한 점이 많아서인지 나는 가끔 만나는 그가 좋았고,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붙이는 몇 안 되는 동기 중 한 명이었다.


그가 평범한 문학지망생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입학한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는 당시 소수파이던 PD계열 내에서도 급진적인 노선의 운동권이었고,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던 것도 교내에 세력이 없다 보니 외부에서 주로 활동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가 학내 시위에 참가한 적도 없고 평소에 운동 관련한 얘기를 한 적도 없어서 동기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사람이 공부를 하든지 문학을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사람 자체를 본다. 무엇에 빠져있는가는 그가 선택한 문제이고 그의 삶이지 내가 그를 판단하는 기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준거 집단에 따라 말과 행동이 크게 달라진다면 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이다.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그는 가끔 문창과에 모습을 드러냈고, “창비에서 왜 요즘 책 안 나와.”라는 내 농담에 허허 웃어주었고, 내가 면바지로 패션을 바꿨을 때도 여전히 양복바지를 고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졸업한 후에는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그의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한다. 2000년대 이후 출판그룹이 된 창비는 돈벌이와 제 식구 감싸기에 빠진 문학권력으로 변질되었지만, 90년대 ‘창비’와 두 명의 ‘창비 아저씨’는 내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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