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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소녀 Jan 30. 2017

설거지 단상

자라던 무렵부터 결혼해서 집을 떠나오기 전까지, 설거지는 주로 제 담당이었습니다. 몸이 안좋으신 아빠를 수발하며 일도 하시는 엄마가 삼남매를 키우며 매일 밥을 해주시는데 설거지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청소와는 담을 쌓았기에 제방에 들어오시는 부모님의 혀차는 소리만 견디면 되었지만 설거지는 달랐습니다. 그때그때 밥을 해준 사람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 설거지를 하지 않고는 다음 밥을 먹을 수 없는 것. 설거지는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해야 하는 최소한의 것이었지요. 식사를 하고 엄마가 치우실라치면 "엄마 놔두세요. 제가 할게요."가 입에 붙는 말이 되었습니다.    


엄마를 돕기 위해 자원했던 설거지이지만 어디까지나 저는 조력자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니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먹은 그릇을 씻는 것만으로 제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설거지를 하고 나면 엄마는 뒷정리를 다시 하며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하셨습니다. '도와주는건 정말 고마운데 항상 더 깔끔히 하는 버릇을 들이라'고. 성정이 깔끔한 엄마는 언제나 식사를 하고 나면 바로 치우려 하셨고, 우리들은 그걸 견디지 못했습니다. 하루이틀 좀 놓아두면 어떠냐 남들 다 그러고 산다며 게으름을 피우려 했지요.


결혼하고 내 살림을 살아보니 주방 살림이란 쉴새 없는 설거지의 연속입니다. 먼저, 식사를 할 때만 설거지가 나오는 게 아니지요. 중간중간 챙겨먹는 간식들, 이렇게 저렇게 따라먹은 물컵들, 두어번 먹고 나면 어김없이 빈 바닥을 드러내며 설거지를 기다리고 있는 국 끓인 냄비들, 주방 정리좀 할라치면 또 나오는 비워진 그릇들... 씽크대와 기름 튄 가스렌지도 한 번씩 닦아주어야 하지요. 조금 게으름을 피우며 쌓아놓고 있다보면 아예 주방 가까이 가기가 싫어지니, 차라리 그때그때 해놓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리 선생님들마다 하는 '설거지는 바로바로. 그렇지 않으면 부엌에 들어가기 싫어진다'라는 말을 체감하게 되었으니 결혼 전 우리 엄마의 잔소리와 넋두리가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도 설거지를 하다보면 얻어지는 수확이 있습니다. (지금은 창이 없지만) 주방의 창밖을 바라보며 설거지를 하다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무언가 좋은 걸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지요.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밥통 위에 올려두고 음악을 틀어놓아도 좋고 그러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자연스레 마음을 다스리게 되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니까요. 집에서 이런 시간을 경험할 때는 샤워할 때와 설거지를 할 때인데, 아마도 한자리에 가만 서서 무언가를 하나씩 깨끗하게 하는 작업의 특성 상 그리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깨끗해진 씽크대를 보면 기분 또한 뿌듯하니 다음 번 주방에 들어올 때도 무언가 의욕적으로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엄마가 늘 제게 하셨던 이야기를 제가 신랑에게 합니다. "그릇만 닦는다고 다가 아니다! 뒷정리를 조금더 깨끗이 해주면 좋겠다!" 아마 신랑도 결혼 전의 저처럼 조력자의 역할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나봅니다.(신랑은 빨래 담당인데 빨래에선 저도 조력자랍니다. 그런데.. 빨래는 주 1회이고, 설거지는 수시인데요?!) 조금 더 노하우가 붙으면 요리하면서 척척 설거지도 다 되어 있는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결혼한지 3년이 되어가는 새댁(?)이 집 전체도 아닌 작은 주방 살림이 버거워 떠올려본 설거지 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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