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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소녀 Mar 17. 2017

직업으로서의 꿈

바이올리니스트

소녀의 꿈은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무대에서 멋들어지게 연주해 환호성을 받는 그런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무난히 음대에 들어가 결혼식 아르바이트 정도 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말이다. 매일같이 각 교본마다 열 번씩 연습해야 하는 피아노가 지겨워서, 바이올린을 시작하면 더이상 피아노 연습을 안해도 된다는 말에 학교 특별활동으로 시작하게 된 바이올린이었다. 연습을 열심히 하지 않을 때마다 엄마는 그만둘거니 계속할거니 너의 생각을 말해봐라 물으셨고, 그냥 별 생각이 없었던 소녀는 이게 아닌 다른 길을 알지 못해서, 지금까지 한 것을 그만두기는 아까워서 계속하겠다고 했다.  

딸은 평범하기 그지 없는데 눈높이는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나 세계적 발레리나 강수진에 두고 있었던 엄마는 공부와 악기 둘 다 하려면 놀거 다 놀면 안된다며 집에 걸려오는 친구들의 전화도 바꿔주지 않았다. 방 안에서 연습 소리가 나지 않으면 밖에서 바로 알 수 있었기에 소녀는 보면대 위 악보에 보고 싶은 책을 겹쳐놓고 책장을 넘겨가며 의미 없는 줄만 그어대곤 했다.

바이올린이 아주 싫었던 건 아니었다. 입시를 앞두고 갖게 된 좋은 악기는 붉은 기가 도는 빛깔과 그 소리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매일 악기를 열 때마다 악기에서 나는 향긋한 나무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가까이 갖다대곤 했다. 고3 때는 매일 7~8시간씩 연습하며 나름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실기시험 준비 기간에 같은 선생님에게 배우던 재수생 오빠와 연애질을 하느라, 절박하게 해도 모자랄 시기에 겨우겨우 연습하는 시늉만 하다 모든 대학에 똑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아. 막막한 결과에 아빠는 어찌나 불같이 화를 내시는지. 네 성격에 재수는 절대 못할거고 집에서도 재수는 못시킨다는 말에 원서를 넣은 전문대는 합격소식을 듣고서도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마을버스를 타고 돌며 방황하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밤 주머니 속 동전을 털어 눈물 젖은 편의점 컵라면을 먹으며 내린 결론은 진로를 바꿔 재수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입시 때면 매일 시간당 십만원씩 하는 레슨비를 들일 면목이 더는 없으니 택한 일이었다. 절대 재수를 못 시킨다고 했던 아빠는 안방에서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오셨다. 아빠가 미리 오려두었던 재수종합학원 신문광고지였다.


기자

하루종일 학생들을 가둬놓고 공부시키는 재수학원에서 한 해 더 공부해서 운 좋게 버젓한 대학에 들어갔다. 원서를 넣기 하루 전날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 과 이름을 읊어대며 "어디가 어울릴 것 같아?" 물어 결정한 전공은 옛날 말로 하면 '신방과'라 불리우는 언론계 인력 양성소였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세상에 어리둥절 하면서도 전공과목인 <기사작성기초> 수업을 들으며 어린 대학생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교수님의 기자 시절 무용담이 경이로웠고, 신문사라는 곳은 진실에 투철하고 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멋진 사람들의 집합소로 보였다. 깐깐하기 그지 없었지만 원리원칙에 엄격해 더욱 존경스러웠던 교수님의 가르침도 부푼 가슴에 한몫 했을 것이다. 경찰서를 돌고, 보도자료로 기사를 쓰고, 유명인을 인터뷰하는 과제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해가며 급기야 '나의 천직은 기자'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한가지 길이 전부인 줄 알았던 소녀는, 이제는 대학생이 되어 제대로 된 나의 꿈을 꿀 차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문사 인턴기자 최종면접에 탈락 후 들어가게 된 방송국 보도국에서 그녀는 곧 기자의 꿈을 접었다. 휴학까지 하고 6개월을 일했지만 보도국 기자들도 그저, 매일의 일상적인 하루를 견디고 시간이 되면 들어와 그날의 리포트로 하루를 마감하는 직장인에 다름 없는 현실을 보았던 것이다. 황우석 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하던 때라 선배가 녹음을 따오라고 준 핸드폰에 유명한 이름이 뜨고, 내부 취재정보를 열람할 때 잠시 흥분했던 일들을 제외하면 기자는 더이상 그녀에게 매력적인 직업이 아니었다.

소득은 있었다. 방송국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베스트셀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책을 읽으며 책을 만든다는 일에 흠뻑 빠져든 것이다. 역시나 방송판보다는 인쇄매체가, 매일같이 마감에 정신없는 잡지보다는 호흡이 긴 단행본이 내게 딱인 것으로 보였다. 새로운 세상이 다시 손짓을 했고, 그렇게 출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출판편집자

친구가 이미 취업해서 일하고 있던 출판사에서 대학교 4학년 때 인턴직원으로 일을 하게 됐다. 사람이 이렇게 꼭 맞는 곳에서 일할 수 있을까? 온갖 원고뭉치로 둘러싸인 내 책상은 자리에 앉으면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쏙 들어가는 것 같은 안정감과 충만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 함께하는 일은 매일이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팀장님은 가끔 국내외의 원고를 건네주며 이에 대한 의견을 요청하셨고, 이게 다름아닌 원고검토 일임을 알았던 나는 좋은 의견을 말씀드리기 위해 머리가 분주했다. 저자와 수없는 미팅을 하며 책을 만들어나가고, 책에 들어가는 인터뷰를 진행해 추천사 원고를 작성하고, 교정본이 나오면 교정을 거쳐 필름을 인쇄소에 넘기고, 잘 인쇄되는지 보기 위해 인쇄 감리를 가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책 한 권이 나오면 꼭 내 자식같은 마음에 책을 어루만지기를 몇 번이었다. 국제도서전은 꼭 가보고 싶은 꿈과 선망의 장소였고, 주워듣는 출판계 이야기는 내가 작가들의 세계에 같이하고 있다는 으쓱한 기분이 들게했다. 생애 첫 대통령 선거도 포기해가며 그렇게 휴일도 없이 즐겁게 일을 했다.

출판사가 위치한 자리도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회사 앞 시립미술관은 점심 먹고 산책하기에 멋진 경관을 갖고있었다. 일을 하다 졸립거나 지겨우면 시립미술관 1층에 가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앞 긴 의자에 누울 궁리를 했다. 집에서 가져온 샘플 복분자주를 까먹으며 선배들과 배재공원 스탠드에 앉아 노닥거리고, 화창한 날에는 정동극장에 도시락을 들고가 먹거나, 이화여고 교정과 정동길을 걸으며 운치에 흠뻑 젖기도 했다. 주로 여직원들이 많았던 출판사 선배들은 술자리보다는 문화 행사를 즐겼는데, 술을 싫어하는 내게는 그 분위기도 꼭 맞았다. 대학로, 누룽지백숙집, 찻집 수연산방 등이 선배들과 찾아다녔던 회식장소였다. 당시 강남 지역에 살던 나는 시청 이 일대가 그렇게 좋아서 하루가 끝나면 괜시리 덕수궁과 시청 앞 광장 주변을 뱅뱅 돌다가 집에 가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인턴직원을 정직원으로 채용하던 날, 나는 미끄러졌다. 몇 명의 정직원 후보를 놓고 우리 팀장님보다 조금 더 힘이 센 팀장님의 팀원이 정직원 전환이 되었고, 팀장님은 이렇게 6개월만 더 일해주면 다음번엔 정직원이 될 수 있도록 해주겠다 했다. 집에 돌아와서 이야기를 했을 때, 아빠는 그 팀장은 너를 책임져줄 수가 없다며 조직이라는 데는 너의 미래를 확실히 보장해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했다. 이래저래 자존심이 상해있던 나는 조금더 큰 사람이 되어보고자(그때만 해도 그런 생각에 젖어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출판편집자로 지내고 싶어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내 글로는 먹고살기 힘들테니 남의 글을 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내 이름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고자 출판사를 나오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대학원엘 갔다.


회사원 

대학원을 마치고 다른 사람에게 '나 어디 다녀요'라고 말하기 좋은 회사에 취업을 했다. 석사 과정을 거치며 공부가 내 길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확인했으니 남은 길은 회사에 취업하는 것 뿐이었다. 출판계로 가기에는 이미 높아진 눈에 박봉이 더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도 해야겠다. 망할 일은 없어보이는 회사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우리 아빠는 눈물을 흘렸고 친한 다른 가족에게 자랑스럽게 저녁을 사셨다. 딸이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었노라고 뻥에 뻥을 쳐가면서. 아마 이제 큰딸의 밥벌이 걱정은 놓아도 되겠다는 마음이셨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뻔한 회사원만은 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다녔던 나는 뻔한 회사원이 되었지만 이 또한 최선이라 생각하며 감사했다. 매월 들어와 통장에 쌓여가는 월급은 또다른 종류의 안정감을 주었고, 돈의 씀씀이도 학생 때보다는 커져갔다. 적지 않은 휴가를 딱히 눈치보지 않고 쓸 수 있음에 감사했고, 여성으로서 다른 직장에 비해 좀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제도가 갖춰져 있음에도 감사했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연차가 쌓여갈수록 힘들었던 것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내가 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내게 드는 감정들이 소모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회사는 회사일뿐, 회사에서 자아실현을 할 생각일랑 하지도 말라지만 자꾸만 찾게 되는 내 회사생활의 의미가 충족되지 않아 여러번 심적 방황을 해야 했다. 겹겹이 가로막힌 관료적 프로세스에 짜증이 났고, 조직 내에서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때 지쳐갔으며, 남을 미워하는 자신에게 한번 더 상처를 받았다. 이런 상황이 아마 나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회사를 즐거워하며 다니는 사람을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고 인생을 한탄했으며 회사 이후의 삶을 걱정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 회사란, 어찌저찌 여기까지는 왔지만 나를 잊고 살아가야 버틸 수 있는 곳이었다.

회사가 만족스럽지 못할수록 한때 열정과 흥미를 다해 일했던 출판일에 대한 향수는 깊어져갔다. 달뜬 표정으로 이따금 출판사 얘길 꺼내는 내게, 출판사 출신 경력직 선배는 "아직도 좋아하는군요 책 동네 이야기"라고 말하거나, 출근 전 나의 자리에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출판편집자> 같은 책을 미리 몰래 놓고 가기도 했다.  

더이상 견디기 힘들겠다, 아니 더이상 견디고 싶지 않다 싶을때쯤 나는 회사에 휴직계를 제출했고, 다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있다. 적어도 내가 일하던 조직에서 같은 업무와 같은 구성으로는 말이다.




# 꿈


꿈이란 것에 대해 생각한다. 길고 장황하게 나의 지난 꿈들을 써내려온 것은, 꿈이라는게 항상 같은 모양으로 있지 않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꿈이란 생각했던 대로만 되는 게 아님을, 우연한 기회를 통해 바뀌기도 함을, 꿈을 이루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다 해도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또한 열렬히 좋아했던 일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가슴을 건드린다는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직업으로서의 꿈과 성취 말고도, 가족과 취미, 사랑하는 사람과의 꿈 같은 여러 중요한 것들이 많이 들어와있는 시기를 살아가고 있지만 직업으로서의 꿈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소중하고 중요하다. 일이란 나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수단이며, 역시나 일을 하는 시간이 인생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참 좋아했고 많은 칭찬을 받으며 했던 일은 마음 속에 진한 그리움으로 남아있지만, 이제와서 다시 그 일을 시작하라고 한다면 나는 자신이 없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게 아닐까 싶고, 지금 가진 것을 버리기에는 전보다 지킬 것이 훨씬 많아진 까닭이다. 내가 인턴으로 일했던 출판사는 주요 일간지의 단행본 출판사로서 출판사 치고 작지 않은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두해 전 경기침체에 따른 대대적인 직원 감축 뉴스를 전해들어야 했다. 내가 그 출판사를 계속 다녔더라면, 정직원이 되어 직장인으로서 그러한 현실에 매일 맞서야 했다면, 책을 만드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은 갖고 살았을지 모르되 고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기억이 계속 이어졌을지도 미지수이다.

내가 텅빈 가슴을 안고 '뻔한 회사원'으로 직장에 복귀하여 삶을 살아간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 매일이 내 가족이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베풀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해 준다면 그러한 삶도 귀하지 않다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한동안 그렇게 찾아지지 않던 의미와 즐거움이 나도 모르게 언젠가 찾아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만약 그게 안된다면 마음의 소리가 또 한번 도저히 못하겠다를 외칠 때 한번 더 내게 휴식을 주면 어떨까.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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