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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정 Feb 06. 2018

왜곡된 세상

원래 그런 것은 없다

당연한 것을 의심하는 습관

왜곡이란 당연히 그렇다고 믿는 편향된 사고를 말한다. 주말 등산로 입구를 떠올려보자. 삼삼오오 모여 함께 등반을 시작한다. 정상에 오르면 준비해온 음식들을 함께 나눠 먹는다. 남은 쓰레기는 준비한 비닐봉지에 담아 가방에 넣고 하산한다. 왜곡은 바로 하산 이후에 발생한다.


등산로 입구에는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입구를 지나 큰길로 커브를 돌면 보통 가로수가 하나 서 있다. 그 가로수 아래에만 쓰레기봉투가 수북이 쌓인다. 정상에서 그곳에 버리자고 약속을 하거나, 단톡 방에 좌표를 찍은 것도 아닌데 그곳에만 쓰레기가 쌓인다. 누군가 먼저 쓰레기를 버렸을 것이고, 쓰레기가 버려진 곳에는 쓰레기를 버려도 된다는 왜곡된 믿음이 발현된 것이다.


무려 1,400년 동안 인류는 천동설을 의심 없이 믿었다.
왜곡된 우주관의 역사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지구가 구형이 아니라 평평한 대지였다고 수백 년 동안 믿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항해로 알았지만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지구중심설(천동설)은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면서 왜곡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3세기, 아리스타르코스가 최초로 지동설을 제안하지만 부정된다. 이후 몇몇 천문학자들이 태양 중심설과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대해 언급하지만, 정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후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지동설을 주장하지만, 근거는 빈약했다.


이후 갈릴레오 갈릴레이, 케플러와 뉴턴 같은 학자들이 천체 관측자료를 바탕으로 지동설의 증거를 하나씩 찾아내면서 지동설은 증명된다. 무려 1,400년이나 걸려 발견한 왜곡이었다. 왜곡은 이처럼 무섭다. 한번 믿으면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산다. 그래서 왜곡은 발견하기가 힘들다. 마치 매트릭스 세상에 사는 네오처럼.



세상에서 오직 나의 건축물만 움직인다?
두바이의 봉이 김선달

2008년 두바이 건설 붐이 한창이던 시절의 일이다. 한 부호가 자신이 소유한 지중해 바다 한가운데 멋진 건물을 짓고 싶어 했다. 그가 건축가들에게 내건 조건은 한 가지. 아름다운 지중해의 풍경을 360도로 모두 볼 수 있는 건물이어야 한다는 것.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때 한 건축가가 설계에 도전한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피셔(David Fisher), 이스라엘 출신의 이탈리아 건축가다. 그는 건물은 움직이면 안 된다는 오랜 왜곡을 깨고, 회전식 초고층 빌딩인 Dynamic Tower를 설계한다. 일명 다빈치 타워로 불리는 이 건물은 313m(68층) 규모로 고유하게 각 층은 독립적으로 회전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다빈치 타워의 각 층은 90분 내에 최대 1 회전을 하는데, 이로 인해 타워의 모양은 끊임없이 변한다. 가만히 거실에 앉아 있으면, 360도로 변하는 풍경을 모두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지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데이비드 피셔는 명예박사학위를 위조했고, 여전히 1억 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 왜곡은 사기꾼들이 즐겨 쓰는 수법이기도 하다. 당연하다고 믿는 것을 깨는 순간, 강력한 휴리스틱이 만들어진다.


살색 반찬고를 붙이면 정말 안보이나?
어차피 살색은 보인다.

반찬고 시장은 수십 년 동안 왜곡된 경쟁을 해왔다. 우리가 쓰는 반찬고의 색깔은 대부분 살색이다. 그런데 살색이란 도대체 어떤 색일까? 흑인과 동양인의 피부색은 분명히 다르다. 그럼 동양인의 피부색은 모두 같을까? 나와 내 부모형제의 살색은 같을까? 내 자녀의 피부색은 나와 같을까? 쌍둥이의 피부색은 정말 같을까?


엄밀히 말해 규정된 살색은 없다. 70억 세계 인구의 살색은 모두 미묘하게 다르다. 우리는 살색 반찬고를 붙이고, 안 보일 거라 믿으며 살았다. 살색 반찬고를 붙인 사람을 본 상대방은 살색 반찬고가 보이지만, 살색을 붙였으니까 안 보이는 척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살아왔다. 살색 반찬고는 매우 교묘한 왜곡이었다.



반찬고 회사 큐래드는 이런 왜곡된 경쟁을 인식하고 세상에 전혀 다른 반찬고를 내놓는다. 캐릭터 밴드의 탄생이었다. 살색은 어차피 보인다고 생각한 큐래드는 반찬고에 캐릭터를 넣으며, 살색보다 더 잘 보이는 반찬고를 만든다. 그리고 기존 반찬고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다. 경쟁 제품보다 재구매율이 4.5배가 넘었다.


반찬고 시장은 전통적으로 미취학 아동이 주요 고객이다. 많이 다치기 때문이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넘어져 다쳤다. 엄마가 슈렉 캐릭터의 큐래드 반찬고를 붙여준다. 아이가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슈렉 옆에는 항상 동키가 있어야 해요. 기왕이면 피오나 공주도 함께요. 심지어 큐래드는 아이들의 액세서리로 진화한다. 이쁘니가 다치지 않았는데도 붙이고 다니는 제품이 된 것이다. 왜곡을 깨면 엄청난 휴리스틱의 반전이 발현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희곡의 작가는?
수천 년간 이어온 왜곡 훈련의 비법

왜곡은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서 쉬운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다. 제목 짓기다. 우리는 일하면서 수많은 제목을 지으며 산다. 보고서의 제목, 게시물의 제목, 책의 제목, 아이들의 이름까지. 왜곡을 깨는 가장 쉬운 방법은 왜곡의 정반대 되는 개념을 접붙이는 일이다. 제목 짓기로 훈련해보자.


카리스마 – 강하고, 차가운
아우성 – 소리, 비명, 주장
열정 – 뜨거운, 격정적인


우선 내가 제목에 꼭 쓰고 싶은 단어를 노트에 적는다.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꼭 써야 한다면, 카리스마의 왜곡을 옆에 적는다. 카리스마의 왜곡은 강하다, 차갑다 등이다. 그럼 그 반대의 개념을 붙인다. 따뜻한 카리스마. 아우성 앞에는 소리 없는을 붙이고, 열정 앞에는 차가운을 붙여보자.


따뜻한 카리스마
소리 없는 아우성
차가운 열정


어떤가? 뭔가 새로운데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왜곡의 반대를 접붙이면 낯설게 하기 효과가 벌어진다. 이런 방법을 모순어법(矛盾語法, Oxymoron)이라고 부른다. 서로 모순되는 어구를 나열하는 표현법으로 모순 형용이라고도 한다. 수천 년간 작가들이 사용해온 수사법이다.


세상에서 가장 모순어법을 잘 구사했던 통찰력의 대가는 누구일까? 직업은 작가다. 영국 출생으로, 영국 사람들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다. 그의 모순어법은 줄리엣에게 사랑고백을 하러 간 로미오의 세레나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랑이 가냘프다고?
너무 거칠고, 잔인하고, 사나우면서도
가시처럼 찌르는 것이 사랑이라네.


모순어법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일상에서 상당히 많이 쓰이고 있다. 상처뿐인 영광, 밝게 빛나는 어둠, 찬란한 슬픔, 침묵의 웅변, 똑똑한 바보처럼, 가짜인 진짜처럼, 시를 쓰면 이미 시가 아니다, 눈 뜬 장님,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최대의 악덕이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등. 이제 통찰 훈련이 채우지 못하는 진심을 만나보자. (다음 시간에 계속)


벗이여,
부디 여기 덮인 흙을 파헤치지 마시오.
이 돌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이 뼈를 옮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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