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공기가 차가워지니 학교는 단풍으로 물든다. 하나둘씩 떨어진 낙엽은 교정을 수북이 뒤덮었다. 유난히도 길었던 장마, 무더위, 몇 번의 태풍 등 평범하지 않았던 여름은 어느새 가을로 바뀌었고, 우리는 다시 겨울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여 멈출 수 없건만 가을의 끝자락이라도 잡으려는 듯 느티나무 낙엽은 쌓여만 간다.
가을의 낙엽, 풍천 소축(風天小畜)
주역에서 '쌓임'은 풍천 소축(風天小畜) 괘에 담겨 있다. 갑골문에서 '축(畜)'이라는 글자는 동물의 창자에 음식물을 넣어 매달아 묶어 놓은 모양으로 순대나 소시지를 연상하게 한다. 갑골문의 '축'은 음식을 비축한다는 의미에서 '쌓다', '비축하다'를 뜻하게 되었고, 후에 '짐승', '가축'이라는 뜻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갑골문의 畜
축은 '쌓임'이니, 소축(小畜)은 '작게 쌓임'을 말한다. 바람이 불어 먼지가 쌓였다거나 낙엽 더미, 눈 더미 등이 쌓인 것이 소축이 될 수 있다. 히말라야 산맥처럼 퇴적층이 거대하게 쌓여 있는 우뚝 솟아 있는 산은 '크게 쌓임'(대축)이니 소축과는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주역전의>에는 풍천소축 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괘 됨이 손이 위에 있고 건이 아래에 있으니, 건은 위에 있는 물건인데 마침내 손의 아래에 있으니, 강건함을 저지함은 손순함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손에게 저지당하였으므로 축(저지할 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손은 음이라서 그 체가 유순하니, 오직 손순함으로 강건함을 회유한 것이요 능히 힘으로 저지한 것이 아니니, 축의 도에 작은 것이다. 또 육사(4번째 음효)가 한 음으로서 지위를 얻어 다섯 양에게 좋아하는 바가 되었으니, 자리를 얻음은 유순의 도를 얻음이 되니, 여러 양의 뜻을 저지하였다. 이 때문에 축이 된 것이다. 소축은 소로서 대를 저지하여 모인 것이 작으니, 모인 일이 작음은 음이기 때문이다. <단전>은 오로지 육사가 여러 양을 저지하는 것으로 성괘의 뜻을 삼고 두 체를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 중한 것을 든 것이다."
<주역전의>의 뜻을 간추려보면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강건한 것이 나아가는데 유순한 것이 막았으니 영원히 붙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잠깐 멈추게 한 것이다. 둘째, 육사(4번째 음효)가 여러 양과 함께 이웃하고 있으니 작게 모였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본다면 '교정에 쌓인 낙엽'은 풍천 소축과 닮아 있다. 하늘(天)의 운행은 강건한 것인데, 올해에도 변함없이 가을이 왔으니 천(天)의 상(象)이요, 가을 단풍과 쌓인 낙엽은 잠시 왔다 가니 풍(風)이다. 또한, 쌓인 낙엽이 가을의 끝자락을 잡고 있으니 풍천 소축이라 할 만하다.
사구, 바람에 날려 쌓이다.
풍천 소축은 괘의 모양으로만 본다면 하늘에 이는 바람이다. 하늘에 이는 바람이 뭘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바람은 침식, 운반, 퇴적 작용을 하며 지형을 변화시킨다. 특히, 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날리다가 쌓인 사구는 풍천 소축의 모양과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아래 사진은 이집트의 화이트 사막에 있는 사구인데, 사막에서 생성된 석회암 성분의 미립 물질이 바람에 날려와 하얀색의 모래 언덕을 형성하었다.
바람이 만든 지형들(좌:이집트 화이트 사막의 버섯 바위, 우: 이집트 화이트 사막의 사구), 출처: https://pixabay.com
사구(Sand dune)란 바람에 의해 이동한 모래가 퇴적되어 생긴 언덕을 말한다. 사구는 형성된 장소에 따라 내륙 사구, 해안 사구, 호반 사구 등 다양하지만 모두 바람에 의해 쌓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는 해안가에 형성된 사빈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 사빈의 배후에 모래 언덕을 형성하여 만들어진 해안 사구가 많다. 수많은 해안 사구 중에서 충남 태안군의 신두리 해안사구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 사구는 사빈의 모래가 겨울철 불어온 북서계절풍에 날려 성장하였기 때문에 북서풍의 영향이 적은 동해안 지역에 형성된 사구보다 규모가 크다는 특징이 있다. 신두리 해안 사구는 그 독특한 특징을 인정받아 2001년 천연기념물 제431호(태안 신두리 해안사구)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태안군 신두리 해안사구(출처: 구글어스)
이러한 해안사구는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해안 사구는 인간에게 몇 가지 유용한 점이 있다. 첫째, 해안 사구의 지하에는 많은 양의 담수가 있다. 이 물을 이용하여 생활용수 및 농업용수로 이용한다. 만약 해안 사구가 파괴되면 지하의 담수층이 파괴되어 바닷물이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배후지의 마을과 농경지는 염분이 섞인 물 때문에 유지되기 어려워진다.
둘째,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 퇴적물의 양을 조절하여 해안을 보호한다. 침식력이 강해져 해안가의 모래가 소모되면, 사구의 모래가 공급되어 해안선의 형태를 유지한다.
셋째, 해안 사구는 파도를 막는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한다. 큰 파도나 해일이 해안가를 침범하더라도 해안가를 따라 높게 형성된 사구는 파도를 막아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한다.
이처럼 해안 사구는 인간의 삶에 매우 유용한 자연 자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안 사구는 큰 위험에 처해 있다. 해안 사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언덕이기 때문에 전망이 좋다. 그래서 지방자체단체들 중에는 해안 사구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카페나 숙박 시설을 허가하는 곳들이 있다. 신두리 해안사구의 경우에도 위 지도의 '신두리 해안사구'가 표시된 곳의 남쪽 해안에는 대규모 숙박업체들이 늘어서 있다. 이 해안은 해안사구의 일부였던 곳인데 지금은 해안 사구 위를 건물들이 점유하고 있어 사구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름철 밤마다 터뜨리는 폭죽 소리와 고성방가(高聲放歌)는 신두리 해안사구를 뒤흔든다.
낙엽 한 장, 모래 한 점이 쌓이듯
나무는 여름 동안 할 일 다 했다는 듯 가을바람에 조용히 잎을 떨구었다. 바닷가 모래는 여름철 잘 놀았는지 바람에 날려 언덕에 짐을 푼다. 그런데 나는 바람에 무엇을 내려 놓을까? 연초에 글 서랍이 가득 찰 것을 기대하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지만 달력 두 장 남은 지금에는 쌓인 게 없다.
소리 없이 쌓인 낙엽을 보고서야 비로소 나의 빈 서랍을 알아차리니, 가을바람 불 때면 지난 게으름에 근심이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