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풍산(風山) 점(漸): 경계와 점이지대
몸이 아파 병원을 갔다. 의사는 이 병이 노화에서 왔다고 했다. 몸을 예전처럼 되돌리고 싶지만 노화에서 온 것이라 하니 달리 할 것이 없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보편적 삶의 과정에 서 있다는 자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서서히 변해가는 내 몸을 보니 풍산 점 괘가 떠오른다.
풍산 점(漸) 괘는 위는 손(☴, 巽)이고 아래는 간(☶, 艮)이다. 산(山) 위에 나무가 있는 모양이다. 높은 산 위에 나무가 우뚝 자리를 잡을 때까지 모진 비바람(☵, 1,2,3,4효)이 없었겠는가. 고난을 이겨내고 점차 성장하여 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나무는 풍산 점의 상을 품고 있다.
점(漸)이라는 글자는 중국 절강성의 점수(漸水)라는 하천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그 강물이 워낙 느리게 흘러 '천천히 나아가다(점진, 漸進)'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출처: 한자로드) 느리지만 결국은 목적지인 바다에 도달하는 점수(漸水)의 물줄기가 시나브로 커가는 나무의 모습이고, 마지막까지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이다.
지표 공간에는 잉어, 노랑부리 저어새, 맹꽁이, 사람처럼 생명을 가진 것들이 있는가 하면, 공기, 암석, 물, 햇빛처럼 생명 없는 것들이 무수히 담겨 있다. 그 종류의 다양성과 변화무쌍함을 생각해보면 지표 공간은 매우 무질서해 보인다. 그런데 그 속을 잘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곳은 산지가 많고, 어떤 곳은 평야가 많다. 어떤 곳은 중국어를 사용하고, 어떤 곳은 한국어를 사용한다. 어떤 곳에서는 석유가 나고, 어떤 곳에서는 석유가 나지 않는다. 이처럼 지형, 언어, 자원 등 어떤 기준과 개념을 통해서 지표면을 관찰해 보면 얼핏 무질서해보이는 공간에서도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공간과는 달리 고유한 특성을 갖는 공간을 지역(reg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역과 지역 사이를 경계라고 부른다. 경계에 의해 구분된 지역은 그 기준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지역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기후 지역, 문화 지역, 농업 지역, 식사도구 지역 등이 그것이다. 기준만 있다면 지역을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어 보인다. 이렇게 구분된 지역은 지도에 표현되고, 사람들은 이것을 활용해 지표 공간을 다룬다.
그런데 기준을 통해 구분된 지역이 리얼한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표 공간 위에는 경계를 지을만한 선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도상의 경계에 해당하는 곳을 실제로 가 보면 인접한 지역의 속성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섞여 있거나 한꺼번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위의 '종교에 의한 지역 구분'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의 경계 근방에는 두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혼재해서 거주한다. '식사 도구에 의한 지역 구분'에서도 지역의 경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식사 도구의 경계인 곳은 실제로 여러가지 식사 도구를 사용한다. 이처럼 지역과 지역의 경계에 인접한 지역의 특성들이 함께 나타나는 곳을 점이지대(漸移地帶, transitional zone)라고 한다. 이 용어를 한자로 풀이하자면 '점차 변해가는 공간적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역 구분은 리얼의 세계가 아닌 공간에 대한 추상적 사고의 결과물에 불과하며, '점이지대'는 지역이라는 추상적 공간에 보다 현실감을 더해주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표공간에 점이지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지도에 나타난 지역을 실제 세계라고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된다. 만약 지표 공간과 지도상에 나타난 지역이 일치한다고 믿는다면 자칫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트교 세계와 이슬람교 세계가 오랫동안 불화를 겪은 역사는 지표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차이를 부추겨 공간적 갈등으로 유도한 불손한 의도가 숨어 있다. 종교적 점이지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두 지역 간 차이의 모호하게 만들어 갈등의 요인을 희석시킬 수 있다.
아래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 국가> 지도에는 국가의 주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지역이 구분되어 있다. 이런 류의 지도에서는 국가 밖은 타자이며, 그 국가는 경계 밖의 타자와는 인접했다는 사실 말고는 어떤 관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지역 구분은 특정 주제를 명확하게 나타내는 장점은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내용을 은폐할 위험이 있다. 가령 국경선 부근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어떤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지, 생활권이 겹치지는 않는지 등 주민들의 삶에 밀접한 정보는 보이지 않는다. 이 지도를 보는 독자는 우크라이나와 그 주변 국가 간에 특별한 관계가 없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이 지도가 의도하고 있는 관념을 가진 러시아인과 우크라인은 서로를 온정적으로 바라볼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실제 지표 공간은 그렇지가 않다. 아래의 <우크라이나의 언어 분포>를 실펴보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은 명백하게 러시아 계 언어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러시아와 인접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은 언어적 점이지대이다. 루한스크, 도네츠크, 카리키우, 심페로폴 등지는 언어적으로 러시아인들과 차별성보다는 동질성이 많은 곳이다. 러시아인들이 미사일과 탱크로 마구 때려부실 상대이 아니라는 것이다. '날카로운 선으로 지역을 구분한 지도'와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세심한 변화를 표현한 점이지대적 관점의 지도'를 비교해보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점이지대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공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감수성은 그래서 중요하다. 칼로 잰 듯, 지층이 어긋난 단층처럼 공간을 다루기보다는 경계가 모호하여 언제 어떻게 변했는지 모를 미묘한 점진적 변화의 공간으로 지표공간을 다룰 때 세상을 세심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 도처에서 각종 차이를 빌미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어쩌면 풍산 점(䷸)의 나무처럼, 서서히 변하는 점이지대의 공간적 감수성이 평화를 원하는 세계 시민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더위가 어느새 꺾여 새벽녘에 이불을 찾게 된다. 가을이 오는 것 같다. 어느 새 커버린 초등학교 6학년 쌍둥이들이 할머니의 키를 따라잡았다고 으쓱거린다.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니 세상이 갑작스럽게 변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들은 순간 순간 변화된 결과물일 뿐이다. 갑작스럽게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과를 중심으로 과거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지 세상의 본질은 아닌 것 같다.
풍산 점이 어디 있는가 했더니 세상의 변하는 모든 것들이 풍산 점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