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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 작가 Feb 24. 2022

지리교사 주역을 만나다.

52. 중산(重山) 간(艮): 진퇴양난에서 얻을 수 있는 것

20년 전 일이다. 2002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30여 명의 지리 동아리 학생들과 2박 3일 일정으로 답사를 떠났다. 목적지는 충청남도에 위치한 원산도라는 섬이었다. 대학 시절 원산도를 답사하고 그 아름다움에 감명을 받아 교직에 들어가면 학생들에게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임용이 실현되자 그것을 실천한 것이다. 당시 원산도는 접근성이 좋지 않아 자연환경이 잘 보전된 섬이었다.

원산도를 가려면 대천까지 기차로 갔다가 다시 배를 타야만 했다. 지금이야 해저터널이 개통되어 자동차로 한 번에 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배를 타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동아리 임원들이 미리 예매한 기차를 타고 즐겁게 놀며 대천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7월 중순이라 장마전선이 한반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대천항에 도착했을 때 풍랑주의보가 발효되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학생들 안에서는 걱정 섞인 말이 나왔고, 배가 뜨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답사를 포기해야만 했다. 다행히 매표소 직원은 육지와 가장 가까운 원산도까지만 배가 간다고 했고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쁜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 바람이 약간 불었지만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고, 하얀 갈매기들은 어지럽게 배 위로 날아다녔다. 섬에 도착하자 민박집 할아버지가 우리를 마중 나왔고, 할아버지의 경운기에 짐을 먼저 보냈다. 우리 일행은 햇살에 반짝이는 모래 해변을 걸으며 훼손되지 않은 바다의 느낌을 즐겼다. 하지만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첫날 저녁이 되자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둘째 날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내렸고 풍랑 주의보가 폭풍 경보로 바뀌었다. 다음날은 섬을 떠나야 하는데 배가 뜨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셋째 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아침을 먹고 항구로 나섰다. 30여 명의 일행이 비바람을 흠뻑 맞고 간신히 항구에 도착했으나 항구 직원들은 폭풍으로 배가 운항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미 준비해온 식량은 바닥이 났고, 돈도 다 떨어졌다. 부득이 하루를 이 섬에서 더 머물러야 했다.

어차피 배가 뜨지 않으면 민박집도 예약 손님을 받지 못할 테니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민박집에 돌아가 숙박을 청하자 그렇게도 친절했던 주인 할머니는 안색을 바꾸고 핀잔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카드 결제 시스템도 없었고, 현금 인출기도 없어서 비용 지불을 외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하자 큰 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방 한 칸을 내주며 묵으라고 했다. 7월 중순 기온과 습도가 높아 방은 찜통 같았다. 선풍기가 덜렁 한 대 있는 방에서 30여 명의 학생들은 빗소리를 들으며 밤을 맞이했다. 나는 배고픈 학생들에게 라면을 끓어 먹이면서 학부모님들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배가 뜨지 않으니 항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退), 섬에 더 머물기도 어려워 능력의 한계(限)를 느꼈다. 얄팍한 민박집 주인에게는 원통함(恨)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나갈 수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그때가 중산 간(艮) 괘의 상황이었던 것 같다.

䷳ 중산 간

간(艮) 괘에 대해 <서괘전>에서는 “진(震)은 동(動)함이니, 물건은 끝내 동(動)할 수 없어 멈춘다. 그러므로 간(艮) 괘로 받았으니, 간(艮)은 멈춤이다.”라고 하였다. 간 괘는 그 모양이 앞뒤로 산이 가로막고 있으며, 산 또한 이미 높은 곳에 처하여 더 이상 높아질 수 없으니 그 뜻이 '멈춤', '그침'과 통한다.


교류의 장벽, 산지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이동한다. 이동을 통해 필요한 것을 얻기 때문에 범위의 좁고 넓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동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동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접촉하며 정보를 주고받는데, 이로 인해 문화가 공간적으로 확대된다. 그런데 모든 공간에서 문화가 같은 속도로 전파, 확산되는 것은 아니다. 초원이나 해안처럼 개방적 공간에서는 문화 전파가 원활하게 진행되는 반면 험준한 산지, 넓은 사막, 밀림 등 이동이 어려운 곳에서는 문화의 전파가 더디게 진행된다. 특히, 거대한 산지는 문화의 이동과 확산을 멈추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아래 그림은 고등학교 역사 부도에 있는 '불교의 전파 과정'을 나타낸 지도이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 북동부 지역에서 발생하여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불교는 기원전 2세기경에 이르러 아소카왕의 적극적인 포교 정책으로 북쪽으로는 파미르 고원과 텐산 산맥, 남으로는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지도상으로 가까워 보이는 중국에는 기원후 2세기 경인 후한(後漢) 말에야 비로소 전파되었다. 인도 기원지로부터 중국까지 불교가 전파된 시기 간에는 적어도 600년 이상의 시차가 존재한다.

불교가 중국까지 전파되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인도와 중국 사이에는 티베트 고원이 있다. 티베트 고원은 평균 해발고도가 4천 m가 넘고, 면적은 250만 제곱 km로 남한 면적의 약 25배에 해당한다(남한 면적은 약 10만 제곱 km). 게다가 티베트 고원은 히말라야 산맥, 카라코람 산맥, 쿤룬 산맥 등 험준한 산맥을 품고 있어 인간의 힘으로 이 지역을 단기간에 넘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티베트 고원과 험준한 산지는 인도 문화와 중국 문화의 이동을 어렵게 했기 때문에 두 문명은 확연이 결이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왔다.

티베트 고원 일대는 물리적으로 사람을 오갈 수 없게 만드는 곳으로 중산 간 괘의 뜻과 잘 통한다.


불교의 전파 과정(좌)과 아시아의 지형(우)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원산도에서의 세 번째 밤은 폭풍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내지 않았다. 학생들은 그동안 친구들, 선배들과 나누지 못한 진솔한 이야기를 꺼냈다. 옹기종기 모여 밤새 대화를 나누었고, 나도 그 대화에 끼어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2박 3일의 답사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지만 폭풍우 덕에 한 공간에 머물며 서로를 알아가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새벽이 되자 하늘에는 별이 드문드문 보였다. 아침에 항구로 가서 배를 탔고, 대천항까지 마을버스를 빌려 몰고 오신 학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학생들을 인계했다.

2022년 설날 어김없이 인사를 하는 제자가 있다. 원산도에서 고립(䷳)되었을 때 1학년 기장을 맡았던 학생인데, 20년째 한결같이 내 생일과 명절을 챙긴다. 이 친구 덕에 당시 학생들의 소식도 듣게 되고 자리를 마련해 만나기도 했다. 이들 모두 원산도의 힘들고 아름다웠던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암울한 상황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어려움을 함께 극복한 이들은 서로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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