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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 작가 Sep 21. 2022

지리교사 주역을 만나다.

56. 화산(火山) 려(旅): 여행의 의미

나는 어린 시절 '여행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생기면 여행보다는 집에서 책을 읽고 쉬는 것을 좋아했다. 만에 하나 여행 일정이 생기더라도 느슨한 여행보다는 정해진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오는 것을 선호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빨리 움직이고, 보다 많이 봐야만 했다.

지금 되돌아 보니 내가 했던 여행은 일종의 공간 정복 활동이었다. 내가 어디를 갔고 무엇을 보고 왔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철저한 계획에 의한 여행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지만 행복했던 기억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바뀌었다. 존재 스스로가 목적이 될 때 자유가 찾아온다. 그래서 여행의 목적은 여행이여야 한다. 목적 없는 여행을 떠날 때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어린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면 흥미롭다. 목적이 없다. 그 행위가 목적이다.  여행도 어린 아이들의 놀이처럼 목적 없이 그 자체로 즐겨야 하는 것이다.

여행을 매번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놀다가 해가 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처럼 여행 후에 가볍게 제자리로 돌아올 알아야 한다. 한 사람에 집착하면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여행지에 집착하면 다음 여행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행은 여행지가 아무리 좋아도 오래도록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산에 놀러온 호랑나비같이 살랑살랑 왔다가 바람 불면 훌쩍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여행은 현재만 있다. 과거에 집착해서도, 미래를 계획해서도 행복한 여행을 할 수 없다. 순간의 만남에 최선을 다하면 행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아내가 달력을 뒤적인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강원도 양양에 숙소를 예약했단다. 그간 일에 매몰되어 힘들었는데 며칠 후에 가족과 함께 양양의 가을 바닷 바람을 맞으며 커피 한 잔 할 생각을 하니 설렌다. 여행갈 생각에 빙그레 웃다가 보니 화산(火山) 려(䷷, 旅) 괘가 스쳐간다. 여행(旅行)의 '여(旅)'는 '나그네의 머무름'을, '행(行)'은 '나그네의 이동'을 의미한다.


화산 려(䷷), 나그네의 마음

화산 려(䷷) 괘는 위가 불(☲), 아래가 산(☶)이다. 불은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다. 어딘 가에 붙어서 존재하므로 '붙어 있음'의 뜻이 있다. 산은 우뚝 서 있기 때문에 '멈춤', '머무름'의 의미가 있다. 상으로 보면 산 위에 불이 붙어 있는 모양으로 볼 수 있다. 머무르지 못하고 살짝 붙어 있으니 화산 려가 된다.

화산 려 괘는 천지 비 괘에서 왔다. 하늘은 하늘대로 땅은 땅대로 제 갈길을 가는 것이 천지 비 괘이다. 그런데 천지 비의 5가 3으로 내려오면서 화산 려 괘가 된 것이다. 천지 비의 하괘인 곤의 땅(☷, 1,2,3)에 건의 하늘에 살고 있는 5가 내려왔다(5효와 3효가 자리를 바꾸었다.). 려 괘는 건의 하늘에 살고 있던 5가 자기의 땅이 아닌 곤의 땅에 가서 나그네가 된 것이다.(출처:<주역전의>)

䷷화산 려(旅) <--->䷋천지 비(否)


나그네를 뜻하는 '려(旅)'라는 글자는 본래 군대를 나타내는 글자였다. 旅자는 㫃(나부낄 언)자와 从(좇을 종)자가 결합하였는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고 그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군대의 상이다. 아래의 갑골문, 금문에도 깃발 아래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려(旅)의 옛자. 왼쪽은 갑골문, 오른쪽은 금문(출처:https://hanziyuan.net/)

고대에는 군인 500명을 ‘一旅’로 나누어 하나의 군대를 편재했다. 旅는 고대 중국의 군대 편제 단위였다. 군인들은 전쟁을 위해 오랜 기간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훗날 旅자는 ‘객지살이’라는 뜻으로 확장되었다. 지금의 '旅' 자가 ‘여행하다’, ‘나그네’라는 뜻을 갖게 된 이유는 군대에 편입되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객지살이에서 유래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떠도는 사람들

려 괘(䷷)의 2,3,4,5는 큰 물(☵)의 모양이다. 큰 사건이 잠재하고 있다. 게다가 호괘(3,4,5는 택(☱), 2,3,4는 풍(☴)) 또한 택풍 대과(䷛)로 더 거대한 사건(1,2,3,4,5,6, ☵)이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려 괘(䷷)에는 어떤 큰 사건에 휘말려 정처 없이 떠났거나 혹은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아 불안한 모양이 담겨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는 화산 려 괘처럼 정주(定住)가 불안한 이주민, 무국적자, 실향민 등 '보호대상자'가 74,791,939명(2018년 유엔난민기구 통계)이나 된다. 2021년 기준 남과 북을 합한 총 인구가 7,720만 명임을 감안한다면 전 세계 '보호대상자' 인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아래 자료를 살펴보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중동 및 북부 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태평양 지역 순으로 보호대상자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보호대상자에는 난민, 비호신청자, 귀환민, 국내실향민, 무국적자 등이 있는데, 그 의미가 차이가 있다.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를 말한다. 비호신청자는 스스로가 난민이라고 말하지만 난민신청이 결정적으로 평가되지 않은 사람을 의미한다. 국내실향민(IDP)은 무장충돌, 일상화된 폭력, 인권침해 등을 당했으나 난민과는 달리 국경을 넘지 않고 자국내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출처: 유엔난민기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 미얀마의 로힝야 족 박해, 시리아 민주운동 박해, 요르단 독재 정부의 탄압, 차드 내전, 아프리카 사헬 지역 분쟁, 베네수엘라 경제 문제 등 지구상에는 아직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쟁 및 불안 지역들이 있다. 이들 분쟁이 해결되어야만 그 주변국들은 난민에 대한 인도적 책임을 피할 수 있다.

얼마 전 제주도에 예민 난민 신청자 481명 중 2명이 난민 인정을 받았고, 412명이 인도적 체류허가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여야한다, 받지 말았어야 한다 등 시끄러웠다. 이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국제 사회가 안정될 수 있도록 국제 협력을 강화해 나갈 때 근본적인 해결을 볼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떳떳하고 밝은 뜻(☲)으로 신중하게(☶) 국제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것이 화산 려가 제시하는 해결 방안이다.


여행은 만남

여행은 만남이다. 바다의 관대함을 만나고, 산의 중후함을 만나고, 꽃의 향기로움을 만나고, 갈매기의 애절함을 만난다. 여행에서 우리는 여러 대상들을 두루 만나면서 평소에 겪지 못한 생각, 감정, 오감을 경험하게 된다. 일상에 매몰되어 생각이 고루해지고 감정이 매마를 때 배낭 하나 들쳐매고 지금의 장소를 벗어나면 새로워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세계는 물체들의 집합체이고 의미는 물체들의 마주침에서 발생한다.'라는 스토아 학파의 말처럼 여행에서 세상 사물과 마주치는 동안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세상의 의미를 보게 된다. 여행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새로운 의미 체계에 접근하게 되고 그것이 쌓여 결국 새로운 '나'를 만든다. 그래서 생소한 곳으로의 공간적 변화를 추구하는 여행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지름길이다. 여행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동떨어진 곳일수록 더욱 새로움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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