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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 작가 Sep 08. 2022

지리교사 주역을 만나다.

55. 뇌화(雷火) 풍(豐): 풍요로울 때 생각해야 할 것 

풍성한 바구니

야근할 일이 있으면 단골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 학교에서 식당까지는 직선 거리로 200m 정도이다. 짧은 구간이지만 다니다보면 마을의 다채로움을 엿볼 수 있다. 요즘 눈에 띄는 것은 과일 좌판이다. 좌판의 상인은 농사일에 그을려 피부가 검고 건강한 눈동자와 목소리를 지닌 여성분이다. 그 분이 운영하는 좌판에는 가을을 알리는 사과, 고구마, 마늘, 파 등 햇작물들이 바구니에 가득하다. 건강하고 풍성함이 느껴진다. 함께 식사를 나온 교감 선생님은 그런 풍경을 좋아해서 그 앞을 지날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주인에게 말을 건다. 교감 선생님이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것을 2년 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이야기를 듣는다.

"안녕하세요? 이거 여주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교감 선생님? 여주 맞아요. 하나 사시게요?"

"이거 우리 어렸을 때 속 안에 들어 있는 빨간 거 많이 먹었었는데, 이거 왜 이렇게 크지? 예전엔 작았었는데?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 언젯적 이야기를 하고 계세요? 답답허네. 커진지가 언젠데."

"이렇게 큰 여주는 뭐 해 먹는 거예요?"

"아이고, 선생님이 그것도 몰라요?"

 고래고래 큰 소리로 대화하는 내용을 듣고 있자면 이 둘은 물건을 사고 파는 관계가 아니다. 상인은 안 팔아도 그만인 사람 같고, 교감 선생님은 살 마음이 없다. 장사하는 집 앞에서 돈 냄새 나지 않는 대화라니! 둘의 대화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바구니에 담긴 햇과일은 풍성하기만 하다.


한가위가 다가오니 가을바람 선선한데

햇사과를 가득채운 바구니는 풍년이라

입담좋은 좌판상인 교감선생 나무라도

입가미소 넉넉하니 마음또한 여유롭다.


햇사과 가득한 바구니를 보니 풍년을 의미하는 뇌화 풍(䷶) 괘가 떠오른다.  

 

䷶ 뇌화 풍

풍(豐) 괘는 위가 진(震, ☳), 아래는 리(离, ☲)이다. 진(☳)은 곡식을, 리(☲)는 그릇을 나타낸다. <주역사전>에서는 "하괘인 리(☲)는 '두(豆)'가 되며(외부를 에워싸고 있고, 가운데는 텅 비어 있는 모습이 마치 '豆'의 제기의 형상과 같음), 상괘인 진(震)은 기장(黍稷, 서직)이 되니 그릇에 풍성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뇌화 풍(䷶) 괘는 '풍(豐)'자의 모양과도 통한다. 

풍(豐)의 갑골문자. 제사에서 사용하는 그릇에 곡식이 담겨 있는 모양이다.(출처:hanziyuan.net)

'풍(豊)'이라는 글자는 ‘풍성함’, ‘넉넉함’'이라는 뜻이 있다.'풍(豊)'자의 갑골문을 보면 '두(豆, 제사 때에 쓰는 그릇)'자 위로 禾(벼 화)자나 丰(예쁠 봉)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제사 그릇에 곡식이 풍성하게 담겨있는 모습이다. 

풍(䷶) 괘는 태(䷊)괘에서 온 것이다. 태괘의 4효가 2효와 자리를 맞바꾸면 풍이 된다. 지천 태의 상호괘가 뢰(3,4,5, ☳), 하호괘가 택(2,3,4, ☱)인데, 그릇에 곡식이 담겨 있는 뜻이 이미 있다. 지천 태 괘가 뇌화 풍으로 변화하는 모양이 추수한 곡식을 품고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다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그 곡식들을 제기에 올려 놓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천 태 <-->䷶뇌화 풍


풍요로울 때 지켜야 할 것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후 세계 곡물 유통에 문제가 발생했다. 곡물자급률이 낮은 나라들은 곡물 수입에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치솟는 물가를 견뎌야만 했다. 2020년(양곡연도 기준, 2022.08.10 농림축산식품부 보도자료)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20.2%, 식량자급률은 45.8%로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비되고 있는 대부분의 식량 자원은 수입에 의존한 것이다. 각 가정의 냉장고마다 먹을 것들이 쟁여져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 땅에서 생산된 것들이 별로 없는 것이다. 

세계 곡물 시장을 곡물 4대 메이저 그룹(미국의 Archer Daniels Midland(ADM), 브라질의 Bunge(분게), 미국의 Cargil(카길), 프랑스의 Louis Dreyfus (LDC))이 80%가량을 차지하고 있고, 전세계 밀 생산 상위 5개국(중국, 인도, 러시아, 미국 프랑스)의 생산량이 전 세계 생산량(2019년, 765,769,635톤)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곡물 자급률이 20.2%로 낮은 우리나라는 그야 말로 안보 위기에 빠져 있다. 이들 기업과 국가가 식량을 권력화하여 횡포를 부릴 경우 우리는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나마 곡물 자급을 하고 있는 20.2%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95%에 달하고 있다. 쌀이 중요한 국가 안보적 자산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해마다 농지 면적과 농가 수가 줄어드는 마당에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 온 것 같다. 

출처: 농민신문, 자료: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은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의 대상이었다. 도시의 노동자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곡식 가격 수준을 낮추는 정책이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저곡가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친 결과 농사짓던 젊은이들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 몰려든 젊은이들이 도시의 노동자가 되어 경제 성장의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그 결과 농촌은 젊은이 없는 쇠락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대한민국의 경제'에 농업은 보호 대상이 아닌 희생과 봉사를 강요받았고 그 결과 지금은 '지방 소멸'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뇌화 풍(䷶)의 호괘는 위가 택(☱, 3,4,5), 아래가 풍(☴, 2,3,4)인 택풍 대과(大過, ䷛)이다. 대과 괘는 겸괘로 보면 큰 물(☵)에 해당한다. 물은 일, 고난을 상징한다.

 우리나라가 세계 몇 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느니, 일본의 일인당 GDP를 따라잡았느니 하는 기사가 뉴스에 도배되어 있다. 우리는 물질적인 목표를 달성했고, 그 풍요로움에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뉘앙스의 보도가 많다. 하지만 풍요로울 때 뇌화 풍 괘를 되새겨야 한다. 뇌화 풍의 풍요로움 안에 택풍 대과과 숨겨져 있으니 큰 후회가 있기 전에 이를 경계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농촌을 보살피고, 농민들을 보호하여 식량 안보 위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래본다.


추석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날씨다. 덥지도, 춥지도 않다. 좋은 시절이다. 하지만 이런 시절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변하기 마련이다. 달은 차서 기울고, 해는 중천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등 따시고 배부른 이들에게 지금 상황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하랴. 하지만 이 상황이 영원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추석 보너스가 들어왔다. 숫자를 바라본다. 풍요로울 때 나갈 돈을 헤아려본다. 뇌화 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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