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풍수(風水) 환(煥)
아내가 새벽 배송으로 아침거리를 주문했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전날 11시까지 주문하면 새벽에 집 앞까지 배송해준다. 신선한 채소, 과일을 발품 팔지 않고 집에서 받을 수 있으니 여간 편한 게 아니다.
새벽 배송 업체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 같은 맞벌이 부부들은 주중을 살기 위해 주말에 장을 보러 다녔다. 토요일과 일요일 중 하루는 일주일 먹거리를 한꺼번에 사야만 했고, 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시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새벽 배송 업체가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쇼핑 시간이 줄어들었고, 그 남은 시간을 여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서비스는 치열하게 사는 각박한 도시민들의 삶을 느슨하게 해 주었다.
배송 봉지를 뜯으니 드라이아이스가 눈에 들어온다. 고체이산화탄소인 드라이아이스는 온도가 낮고, 고체에서 기체로 사라지기 때문에 물이 생기지 않아 채소를 신선하고 깔끔하게 배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릴 적 드라이아이스를 가지고 놀던 생각이 나서 물컵에 드라이아이스를 넣어본다. 보글보글 거품과 함께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드라이아이스는 녹으면서 컵 위로 하얀 머리를 풀고 흩어진다. 단단하게 언 얼음이 물방울로 기화되는 순간 풍수(風水) 환(渙) 괘가 떠오른다.
정자는 “환은 풀어져서 흩어짐이니, 물이 바람을 만나면 흩어진다.”라고 하였고, 주자는 “바람이 물 위로 다니는 형태이다. 나누어서 쪼개고, 나누어서 흩는 상이다.”라고 하였다. 다산 선생은 <주역사전>에서 “환(渙, ䷺)괘는 비(否, ䷋)괘로부터 왔다. 비괘의 때에는, 북방이 혹독하게 추워서 건의 얼음(☰)이 굳게 얼어 있었는데, 추이(推移, 4가 2로 이동)하여 환괘가 되면 한 조각의 건(☰, 乾)의 얼음이 곤(☷)의 따뜻한 데로 들어가고, 손(☴)의 바람이 부드럽게 순하여 감(☵)의 물이 흘러 움직이니 이것이 이른바 “환연빙석(渙然氷釋)”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겨울철 얼어붙은 땅은 생명이 발붙이기 힘들지만(䷋), 따뜻한 바람이 부는 봄이 오면 얼음이 녹으며(䷺) 만물이 약동(2,3,4가 ☳)한다. 겨울 동안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생명들은 얼음의 위협에서 해방되어 분주히 움직인다. 먹이활동을 하고 구애행위, 짝짓기를 하며 자손을 뿌릴 준비를 한다. 봄바람(☴)은 얼음을 녹여 계곡마다 물이 흐르게 하고(☵), 물은 생명의 에너지를 싣고 구석구석 생명들을 자라게 한다.
하지만 얼음 녹는 것이 마냥 반갑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여름철 강수가 집중된 지역에서는 홍수(flood)가 보통 여름에 일어나지만, 연중 강수량이 일정한 서부유럽 국가들에서는 홍수의 요인이 우리와는 다르다.
일반적인 경우 서부유럽에서는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기보다는 겨우내 산지에 쌓였던 눈이 녹는 봄에 홍수가 난다. 평년에 비해 겨울철 알프스 산지에 눈이 많이 내린 해에는 봄철에 이 눈이 녹으면서 하천의 유량이 증가하여 범람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겨울철 쌓인 눈의 양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하천에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이 흐를지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측 가능한 자연의 변화는 더 이상 인간을 위협하지 못한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인간의 예측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지구 기온의 상승으로 여름철 폭염이 증가하면서 알프스의 만년설이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다. 빠르게 녹아내린 융빙수가 빙하 아래를 흐르면서 빙하 자체의 흐름을 더 빠르게 만들어 산사태와 눈사태의 위험을 키우고 있다.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돌로미티산맥 마르몰라다산(해발 3,300m) 일대에서 2022년 7월 초 빙하가 붕괴하면서 2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여름철 기온 상승으로 산 정상의 기온이 영상 10도를 웃돌면서 빙하가 붕괴되어 산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탈리아 극지과학연구소 (CNR) 연구센터의 전문가들은 빙하 대부분은 이미 녹아 사라졌으며, 향후 30년 이내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기사출처: 중앙일보, 2022.7.5.) 스위스 알프스 관광 명소 융프라우에서도 융빙수로 인한 산사태 피해를 막기 위해 관광객의 등정을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오해(誤解)'라고 한다. 한자를 풀어보자면 '그릇되게 풀어낸 것'이다. 상대는 그렇지 않은데 자신의 머릿속에서 상대를 그릇되게 풀어낸 것이다. 오해가 생기면 오해받은 상대도 억울하기 때문에 문제가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천지 비(䷋)의 상황이 펼쳐진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부드러운 말과 태도(풍수 환(䷺)의 상괘가 풍(☴)) 이다. 적대적인 갈등관계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말과 행동(☴)으로 녹여야 한다.
최근 정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여당과 야당의 갈등관계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선량한 시민들이 희생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부드러운 봄바람이다. 누가 그 역할을 할 것인가.
오해를 이해로 바꾸고, 경직된 것을 부드러움으로 바꾸면 불편함(䷋)은 사라지고, 묵은 감정도 눈 녹듯 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