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희망은 없지만, 말초적 기쁨만큼은 공장식으로 공급되는
작가가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탕비실에서 엿들은 대화.
1
일을 시작하고 난 다음부턴 현실에 제대로 올라타있기가 영 버겁다. 이미 지나간 날짜를 아직 먼 미래처럼 생각하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버린 커피 스틱이나 영양제 따위를 내다 버린다. 글을 쓰는 일은 갈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이제는 써야 한다는 생각마저 접어버린 지 꽤 되었다.
그래도 일을 해야 하므로 종종 글을 쓴다. 그마저도 어떻게 하면 아주 쓰지 않을 수 있을까를 궁리한다. 그 궁리가 잘 통한 덕분에 나는 직함을 여러 번 바꿨다. 직함이란 직원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게 주요 용도라 뭐라고 불리든지 간에 큰 상관은 없지만, 직함이 바뀔 때마다 직접 글을 쓸 일이 줄어드는 것만은 확실했다.
2
어떤 책에 따르면, 무언가에 집중하다 방해받을 때마다 아이큐는 10 정도 하락한다고 한다. 이건 사무실 책상에서 대마초를 빠는 게 차라리 나을 만큼의 매우 심각한 인지능력 저하라고.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매일같이 치열하게 일하며, 조금씩 멍청해지고 있는 거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있단 것은 좋은 일. 단 게 당기면 갈 탕비실이 있다는 것은 복된 일.
무엇보다도 그에겐 매월 같은 날 들어오는 돈이 있다. 그는 돈을 아껴주지 않는다. 겉으로는 구원을 기다리는 듯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선 그 가능성을 믿지 않는 불경한 태도로 카드를 쓴다. 커피에, 택시에, 잠시만 쓰고 버리는 것들에.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믿을 게 못 된다. 글도 쓰지 않고 저축도 하지 않는다. 성장을 업신여기면서도 노화는 두려워한다. 돈과 의미는 둘 다 신 포도다. 그는 그냥 눈앞의 일에 몰두하기로 한다. 콜로세움에 던져진 검투사처럼.
3
먼 옛날에 유명한 검투사가 있었다. 그 또한 열심히 그의 일을 했다. 마침내 업계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고, 굉장히 유명해졌다. 하지만 끝내 자유로워지진 못했다. 이 이야기의 배경도 대도시였다.
서울. 구원의 희망은 없지만 말초적 기쁨만큼은 공장식으로 공급되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탕비실은 어디일까.
4
인왕산 오르막엔 오래된 가압장을 개조한 건물에 들어선 문학관이 있다. 가압장은 물이 산을 잘 넘어가도록 압력을 더해주는 건물이다. 주말에 산을 찾은 등산객들은 이 건물에 잠시 들러서, ‘시는 세태에 부닥치며 비겁해지기 쉬운 우리의 영혼에 압력을 더해주므로 영혼의 가압장’이라는 안내 문구를 읽고 감명받곤 한다. 다시 돌아오는 월요일, 어쩌면 그들 중 누군가는 가방에 시집을 한 권 넣고 출근하게 될지도.
-일러스트레이티드 에세이 <때려치지 않는 사소한 이유>는 매주 월, 수, 금 연재됩니다.
-ⓒ 2026. strangecowcow all rights reserved. 본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배포 및 AI 학습 이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