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 일을 정말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니. 아니면 떠나버리렴.
장기 여행을 여러 차례 다녀오고 난 다음부터 내겐 비겁한 버릇이 생겼다. 삶의 한 시기를 좀 긴 여행쯤으로 ‘퉁’ 쳐버리는 것이다. 어떤 삶을 선택하면 나는 딱 여행자가 그러하듯 표면에서만 분주히 움직이며 찬탄하고, 훔치고, 오해하고, 지겨워하다가 이제 그만 떠나겠노라 한다. 떠나지 않으면 여행자가 아니니까 죄책감 따윈 없다.
그렇게 나는 얼마나 많은 시절들을 건성건성 여행했었나. 요즘은 이런 것도 다 경험이라며 그럭저럭 값을 쳐주긴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경험의 실체란 여행지에서 사 온 조악한 마그넷 정도일 뿐이란 걸. 종종 이 마그넷들을 대단한 것인 양 자랑해야 할 때 나는 미간이 뻐근하다. 기도가 조여 오는 듯하고 두피가 가려워진다. 그것들이 죄 싸구려에 가짜란 걸 알고 있는데 그것으로 나의 오늘을 변제한다는 자각이 찾아올 때마다 앓는다.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는 여태까지 중 가장 오래 다닌 곳이다. 3년이 다 되어간다. 3년 남짓 다닌 것 가지고 이런 말 하는 게 웃기단 걸 잘 알지만, 어쨌든 내겐 처음 있는 일이다. 3년이라니. 정말로? 앞으로도? 지금 떠나지 않으면 승진도 해야 한다. 머물 권리와 떠날 자유를 함께 주는 무정한 애인 같은 회사의 물음. 너는 이 일을 정말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니. 아니면 떠나버리렴.
몇 년 전, 마지막으로 떠났던 장기 여행에서 귀국하는 날. 이스탄불에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그만 놓쳐버렸다. 거기서 만난 애랑 꾸물거리며 헤어진 탓이었다. 미적대다가 귀국을 유예해 버린 여행자도 여전히 여행자인가. 공항에서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 비행기 놓쳤어’라고 메씨지를 보내던 내 표정은 어땠더라. 그때의 표정을 해독해야 떠나든 머무르든 결정을 내릴 텐데. 결격사유 없는 마음을 드르륵드르륵 끌고 다닌다.
-일러스트레이티드 에세이 <때려치지 않는 사소한 이유>는 매주 월, 수, 금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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