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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Jan 29. 2020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거라면 니가 하고 싶은 대로

중요한 판단이 필요한 일이 있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 판단하는 게 더 나은 일이 있다. 해당분야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더 많은 사람이 결정하는 게 더 나은 일이 분명히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도 그렇게 하는 게 더 맞아 보이고, 실패할 확률이 낮아 보인다. 수긍이 간다.


그런데 말이다. 사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 그런 일보다는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일이 사실 더 많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의 본질에 대한 결정을 하는 일보다는, 일의 본질을 이루기 위해 부수적인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일이 더 많다는 얘기이다. 전략을 세우고, 목표와 비전을 세우는 일 그 자체보다는  전략을 세우기 위해 관련 정보를 모으고,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관련자들에게 통화를 하는 데 사용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물론 직급에 따라, 회사 내의 업무분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보통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보다 실무자(통상 짬 안 되는 사람들로 불리는 그들)들이 그러한 경우(일의 본질과 핵심적인 일에 시간을 사용하는 경우보다는 일의 본질을 이루기 위한 보조적인 업무에 보다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은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이든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고(리더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고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짬 안 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각자의 역할에 맞는 일을 하자, 이런 얘기는 식상하니까 하지 않는다. 문제 삼고 싶고 얘기해보고 싶은 것은 나이가 적고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일을 할 때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다.


조금은 덜 비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조금은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고 새로워 보이는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월급루팡이 아닌 이상 나이가 적고 경험이 부족하더라도 본인 나름대로의 일하는 방식과 절차와 철학이 있을 수 있다. 팀장님은 휴먼명조체를 좋아하지만, 나는 맑은 고딕체가 더 좋을 수도 있다. 팀장님은 어제의 실적을 확인하는 일을 오전에 해왔다고 말하지만, 나는 점심 먹고 난 직후에 하는 게 더 편하다. 팀장님은 협력사의 동향을 파악하는 일은 월요일에 하는 게 좋다고 하지만, 나는 금요일에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고서에 휴먼명조체를 쓰는 게 더 효과적일지, 맑은 고딕체를 쓰는 게 더 효과적일지 오랜 시간 고민하고 비교 분석하며 결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좀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익숙한 방식대로 한다라고 해서 보고서의 내용이 바뀌지 않는다. 즉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관련된 명확한 회사 규정이 없는 한, 휴먼명조체를 쓰든지, 맑은 고딕체를 쓰든지 대세에 영향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익숙한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맑은 고딕체를 사용해 보고서를 작성했더니, 왜 휴먼명조체를 사용하지 않았냐며 수정을 하라고 한다. 2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 번째 문제, 수정을 하느라 시간이 낭비된다. 이거 수정할 시간에 좀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업무시간을 활용하는 게 나아 보여서 기분이 상한다. 더욱더 중요한 두 번째 문제, 왜 수정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팀장님의 생각에는 휴먼명조체가 좋아 보일지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는 맑은 고딕체가 좋아 보인다. 수정하라는 이유를 물어본다. 물어볼 시간에 수정하는 게 나을 뻔했다. 예전에도 그렇게 했다, 나 때는 그렇게 배웠다, 윗사람들은 그걸 더 좋아한다 등등 공감이 1도 안 되는 설교를 듣느라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간다. 정말 중요한 선택이고,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결정이어서 지시를 한 것이라면 수긍한다. 그런데 전혀 아닌 것 같다. 중요하지도 않고 경험이 필요한 사항이 아닌 것 같다. 한두 번 저항해보다가 그만둔다. 시간낭비다. 그런데, 그래서, 기분이 상하고 내일부터는 생각이라는 것을 집에 두고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꾸역꾸역 수정을 한다.


경영학에서 얘기하는 “EMPOWERMENT”(권한 위임, 이양)이라는 거창한 개념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결정의 권한이 없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일이 얼마나 지루하고, 얼마나 의욕 없는 일인지 말이다.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어느 정도 선택권과 자율권을 부여했을 때 조직에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친다라는 사실을 수업시간에 배우지 않아도 매일같이 몸소 느끼고 있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일이라면 좀 맡겨보면 어떠려나. 정말 너무나도 중요하고 너무나도 민감한 사항이라서 수정 지시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한번 하고 싶은 대로 해보게 하면 어떠려나.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일이라면,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봐라고 말해보면 어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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