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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Feb 17. 2020

상사가 원하는 것

1. 외부기관에서 주재하는 회의가 있어서 팀장님과 함께 회의를 참석하였다. 양 기관이 함께 협력해야 하는 일이기에 서로의 입장과 상황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의견이 잘 좁혀지지 않았다. 더이상 회의를 진행해봤자 서로 간에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아 일단 그날은 회의를 마무리해야 했다. 장시간을 소모하며 한 회의가 소득이 없음이 안타깝긴 했다. 그리고 일이 진행이 잘 되지 않아 안타깝긴 했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안타까운 거였다. 다른 사람에게 혼날까봐 안타까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  팀장님 왈 “사무실 들어가서 진전이 없었다고 보고할 순 없습니다. 이렇게 회의를 끝내고 가면 제가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합니까. 윗분께 회의 결과를 보고해야 하니  보고용 결론이라도 내고 마무리합시다.”


2. 팀장님이 다음 주 행사계획에 대해서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동안 추진해왔던 일들을 한번 돌아보고, 앞으로 벌어지게 될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서 계획을 세워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팀장님께 보고하였다. 좀 수정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좀 수정을 해서 다시 보고하였다.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하셨다. 미흡한 부분을 보완해서 다시 보고하였다. 팀장님 왈 “그래 이거야! 윗분들은 이걸 원하는 거야!”


조직에서, 계급 사회에서는 윗사람들의 생각이 중요하다. 그래서 윗사람들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고, 윗사람들의 기호를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윗사람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혹은 윗분들이 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직의 목적과 방향에 부합하도록, 그리고 그 일이 의미 있는 일이 되도록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며 일을 하는 것이리라. 시켜서 하는 일보다는 나 스스로 목적의식을 갖고 의지를 가지고 일을 해야 보람도 있고 능률도 오를 것이다. 그 와중에 윗사람들에게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윗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에 일을 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맥이 빠지고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차라리 팀장님의 윗분 말고, 팀장님의 의견이 이러하다라고 말하고 지시하면 그렇게까지 맥 빠지진 않았을 것 같다.


3. 또다시 외부 회의에 나갔다. 회의가 있음을 윗분께 미리 보고하였고, 우리 조직의 의견을 검토하고 제시해야 할 방향도 윗분께 미리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서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이번에도 팀장님과 함께 회의를 가게 되었다. 팀장님 왈 “우리 회사 윗분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맞습니다. 맞지요. 윗분에게 보고를 했고 윗분의 의견을 물어서 회의에 왔고, 윗분의 생각을 얘기한 게 맞지요. 그런데, 여기서 나와 팀장님은 우리 회사의 대표 자격으로 온 것이지, 윗분을 대리하기 위해서 온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윗분이 그렇게 얘기하라고 지시를 했다 하더라도, 내가 우리 조직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자신 있게 우리 회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라고 얘기하면 안 되는 것인지요. 솔직히 말해서 조금 부끄럽습니다, 팀장님'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회의가 빨리 끝나길 바래야만 했다.


어느 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우편배달부이냐?”라고. 어릴 적 내 꿈이 우편배달부인 줄 어떻게 아셨는지 궁금해졌다(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사랑이 듬뿍 담긴 편지를 전해주는 일이 너무 낭만적이고 멋지게 느껴졌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아무 생각이 없니? 다른 기관에서 공문이 오면 검토를 해서 뭐가 필요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획을 얘기해야 될 것이 아니냐, 공문 그대로 나한테 가지고 와서 전달만 하려고 너는 이 회사에 들어왔냐? 너가 우편배달부와 다를게 뭐냐?”라고 불같이 화를 내셨다. 내 꿈 얘기는 아니었나보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담당자로써의 생각과 검토의견을 자신 있게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편배달부의 추억이 떠올라 더 아쉬웠다. “팀장님은 우편배달부이세요?”라고 말을 했다가는 내일부터 회사를 나올 수 없을 것 같아 더더욱 아쉬웠다. 설사 진짜 윗분의 정확한 생각을 전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마치 내가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었을까 아쉬웠다. 그리고,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생각을 했다.


사장처럼 일하고 싶진 않다. 사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장의 월급을 받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나만의 의지를 가지고 일을 하고 싶다.  사장의 우편배달부가 되고 싶지 않다. 사장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서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조직의 목적과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만의 의지와 나만의 생각을 자신 있게 펼치며 일을 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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