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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Dec 19. 2019

그에게 기대다 보니 가끔 불편해!

혼자일 땐 머든 내가 다 처리했는데, 그에게 기대다 보니...

배경 이미지 출처: Pixabay



은행 모바일 코드 앱 설치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니?


핀란드에서 공공기관의 온라인 서비스를 로그인하기 위해서는 따로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필요하지 않다. 공공기관의 온라인 서비스는 개개인이 사용하고 있는 은행 온라인 서비스(Netbank) 로그인을 통해 본인인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의 주거래 은행은 원래 순차적으로 사용하는 80개의 비밀번호 리스트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알파벳 A부터 U까지 해당하는 비밀번호가 적힌 비밀번호 카드 (Code Card) 서비스를 제공했다. 몇 년 전부터 은행은 보안을 이유로 고객들에게 비밀번호 카드에서 모바일 코드 앱으로의 이동을 강요했다.


보안 측면에서 새로운 디지털 서비스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인 나는 최대한 비밀번호 카드 서비스를 고수했다. 그러나, 은행은 비밀번호 카드 서비스를 통한 공공기관 본인인증 서비스를 철회함으로써 모바일 코드 앱으로의 이동을 강제했다. 덕택에 실업급여 신청을 위해 핀란드 사회보험기관인 Kela의 온라인 서비스에 주기적인 로그인이 필요했던 나는 벽에 부딪혔다. 은행의 횡포 (?)로 모바일 코드 앱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 처했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더듬더듬 모바일 코드 앱 설치 설명을 읽기 싫었던 나는 그에게 먼저 본인 핸드폰에 앱을 설치하고 내 거도 해달라고 부탁했다.


급할 게 없던 그이기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내 부탁을 계속 미루다가, 폭발 직전이 된 내가 옆에 지켜 서서 그가 행동하기를 종용한 뒤에야, 그는 나의 밀린 요청 두 개를 들어줬다. 아들 학교 간호사에게 시력 검사 문의 메일 보내기와 모바일 코드 앱 설치. 별일 아닌 일을 하는데 엄청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내가 해도 될 일을 미루는 입장이었던 나도 딱히 그에게 머라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립다, 비밀번호 카드!

이미지 출처: https://www.ts.fi/uutiset/kotimaa/3865574/Tileille+saapuvissa+maksuissa+viivastyksia+ja+verkkopalveluissa+kayttokatkoja



실업급여를 부탁해!


우여곡절 끝에 새로 설치한 모바일 코드 앱을 사용해 사회보험기관인 Kela 서비스에 접속했다. 온라인으로 실업급여를 신청하려 했으나, 두 달 넘게 급여 신청을 하지 않은 탓에 온라인 신청이 먹통이 되어 있었다. 내 일이니 내 잘못이 크긴 했으나, Kela 서비스가 핀란드어로 되어 있어 신청서 작성에 그의 도움이 늘 필요한데, 그에게 부탁할 기회를 잡는 것이 나름 일이었다. 게다가 은행의 비밀번호 카드를 이용한 본인인증 서비스 종료까지 더해져 시간이 강물처럼 흐른 탓이었다. 모바일 앱 코드 설치를 차일피일 미룬 그가 순간 엄청 미웠지만, 내가 했어도 될 일을 그에게 미룬 것이기에 딱히 그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모든 것을 상황 탓으로 돌리며 화를 삭일뿐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밀린 실업급여 신청을 위해 Kela 사무실을 방문하기로 하고, 혹시나 싶어 사무실 위치를 확인했다. 주로 가던 사무실은 없어졌고, 새로 생긴 사무실이 낮에 손목 통증 때문에 다녀온 보건소 건물에 있는 듯했다. 다음날, 전날에 갔던 같은 곳을 운동삼아 다시 걸어갔다. 그런데, 보건소 건물에는 Kela 사무실이 없는 것 같았다. 보건소 로비에 Kela를 가리키는 화살표 표시와 관련 서류를 제출하는 통만 보일 뿐이었다. 결국,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니, 보건소 로비에서 Kela 직원 2명이 상주하면서 돌아다니며 민원을 해결한고 했다. 순간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싶어 허탈해졌지만, 혹시 몰라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내 일 처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컴퓨터에서 내 Kela 페이지 로그인을 요청했다. 어제 설치한 은행 모바일 코드 앱이 한몫을 당당히 해내는 순간이었다. 직원은 Kela 온라인 서비스에서 내 상황을 살펴보더니, 내가 어쩌다 두 달 넘게 실업급여 신청을 안 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했더니, 알았다며 실업급여 신청서 서류를 가져다주었다. 핀란드어로 된 서류 작성을 도와준 그녀는 서류를 제출하는 통에 넣고 가면 된다며, 다른 사람을 도와주러 갔다. 일을 처리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번호표가 따로 없어서 의도치 않게 새치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찝찝했다. 어찌하리 지나간 일인 지나간 대로 흘려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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