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답이 없는 아빠의 모습이 다양한 멋진 아빠들을 양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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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오랜만에 친구 E와 한잔 하기로 한 날이었다. E의 집 근처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한 탓인지 E는 약속시간보다 늦게 왔다. E가 오길 기다리는 시간, H&M 키즈 코너의 세일 상품을 둘러봤다. 매장 한편에서 나를 부르는 핀란드 남사친 N이 눈에 띄었다. 쇼핑센터 근처 사는 N은 첫째 딸과 함께 있었다. 어디 가기 애매한 늦은 주말 오후, 딸이 원하는 데로 쇼핑센터로 바람을 쐬러 왔다는 N은 나를 상당히 반겼다.
엘사를 좋아하는 N의 딸이 반짝거리는 스팽글이 잔뜩 달려있는 엘사 드레스를 N에게 보여주며 품평을 하고 있었다. 이쁘다고 온몸으로 감탄하며 말하진 않았지만 사달라는 돌려 까기 기술을 시전하고 있는 N의 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용하지만 단호한 거부의사를 표명하는 N, 부녀가 정말 귀엽게 느껴졌다. 잠시 후, N의 딸이 발견한 또 다른 드레스를 내가 이쁘다 하자, N은 눈이 커지면서 부추기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내게 보냈다.
바로 실수를 인정하고 화제를 돌려 N과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N의 딸이 N을 부르며 자신의 아이쇼핑에 동참하기를 요청했지만, N은 나와의 대화를 핑계로 딸 혼자 매장을 둘러보기를 권했다. 워낙 수다로 죽이 잘 맞는 친구인 데다가 둘 다 각자의 삶에 바빠 자주 보지 못해 N과의 대화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쉽게도 E의 도착을 알리는 전화가 울려 퍼졌다. 딸의 아이쇼핑에 다시 동참하러 돌아가야 하는 N에게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문득 예전에 친구 T가 핀란드 우리 또래의 아빠들이 처음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세대라 적절한 롤모델이 없어 다양한 아빠의 모습들을 볼 수 있고, 아이와 보낸 시간만큼 아빠들도 성장한다며 나의 그인 M에게 아빠가 될 시간을 주라고 했던 조언이 머리를 스쳤다. T의 말이 맞았다. 서툴렀던 초보 아빠 M도 어느덧 상당히 노련한 아빠로 변했다. 내가 아는 주변의 아빠들은 서로 전혀 다르다. T도 N도 M도 예외는 아니지만, 모두 다 자기 다운 멋진 아빠들로 성장했고 성장하고 있다. 모든 엄마들도 그러겠지.
N은 딸이 원하는 데로 딸의 의견을 존중하며 같이 시간을 보내주는 아빠다. 우리 아들이 모래놀이를 할 때 근처 벤치에 앉아 책을 보던 M과 달리, N은 딸이 모래놀이를 하면 옆에 같이 앉아 딸과 함께 모래놀이를 하는 아빠다. N과 딸의 관계에서는 N의 딸이 주도적인 편이다. 딸이 엘사 드레스 아이쇼핑을 하는데, 쇼핑은 버겁지만, 기꺼이 딸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너그러운 아빠가 N이다.
T는 지방의회 의원으로 왕성한 사회, 정치활동 중인 아이들의 엄마의 빈자리를 시기적절하게 채워주는 자상한 아빠다. 딸이 아무 곳에나 그림을 그려 골치다라는 내 불평에, T는 둘째 딸의 일화를 들려줬다. 아이들이 여기저기 그림을 그리는 시기에 T의 딸도 예외 없이 식탁에 그림을 그렸다. T는 딸에게 이토록 멋진 그림을 식탁 위에 그려서 지워야 해서 너무 안타깝다며,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게 다음부터는 종이에 그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아빠로서 전혀 나무랄 데 없는 반응이지만, 왠지 현실에 없을법한 너그러운 아빠 T가 놀랍고도 존경스럽다.
M은 아이들의 눈높이보다는 아이들을 자신의 눈높이로 향하도록 이끌어서 (또는 감언이설을 일삼아) 자신의 취미생활을 같이 즐기려고 노력하는 아빠이다. 아들이 꼬꼬마였을 때부터 M은 아들과 함께 자기가 좋아하는 서부영화를 같이 봤다. 처음에는 아들이 너무 어려서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계속 집중할 수 없었지만, M은 묵묵히 아들과 함께 영화를 봤다. M의 꾸준한 노력은 어느 순간 빛을 발해 아들과 영화를 같이 보는데 큰 불편함이 없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M에겐 아직 복병이 있다. 둘째인 딸이 아들보다 M의 인내심을 더 많이 요구한다. M의 지치지 않는 노력이 눈에 띌 때마다 나는 M이 대견하다.
세상의 모든 아빠들이 또 엄마들이 자기 다운 모습으로 멋진 부모가 되길 응원한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다 너무 소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