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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Feb 03. 2019

김치 담기 대신 전위예술

흥미진진한 빨간 양념을 흩뿌리기, a.k.a. 사서 고생

배경 이미지 출처: Pixabay



2019. 2. 2


그런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평온한 아침이었다. 다른 토요일과 달리 아빠와 아들이 아침 일찍 나가야 했기에 침대에서 좀 더 여유를 부리고 일어나 식구 중 마지막으로 아침을 먹었다. 인스턴트 컵수프와 어젯밤에 사다 놓은 고트 치즈 패스츄리와 크루아상 반쪽을 먹었다. 아이들이 있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때, 언제나 그렇듯 늑장을 부리다 서둘러 나가는 아빠와 아들을 한가로이 구경한 것이 잔잔함을 깨는 유일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니 평소와 다른 그 여유가 사고의 복선이었다.


점심에 김치를 좋아하는 미국인 친구를 초대한지라, 오전에 김치를 담아서 조금 나눠줄 계획이었다. 전날 절여놨던 배추를 헹궈서 물을 빼기 위해 바구니에 담아놓고 마늘, 양파, 사과, 빨간 고추를 믹서에 곱게 갈았다. 여유로우면서도 참 부지런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찰나에 우리 집 부엌은 난장판이 되었다. 양념을 다 갈았기에 믹서기 전원을 뺐는데, 갑자기 양념이 사방으로 튀었다. 얼결에 믹서기 뚜껑을 연채로 전원을 빼기 전 믹서 버튼을 누른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숟가락까지 넣어놔서 숟가락이 튕겨져 나가면서 빨간 양념이 여기저기 튀었다. 싱크대는 물론, 바닥에도, 천장에도...


이미지 출처: Pixabay


식탁에서 컴퓨터로 '마샤와 곰'을 보고 있던 세 살 딸 이삐도 나도 순간 얼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일단 얼굴에 튄 양념부터 닦았다. 도와준다는 이삐를 매워서 안된다고 달래며 청소를 시작했다.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마른하늘에 김치 양념 세례라니~ 하... 상쾌한 기분이 양념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기록을 위해 빨간 점으로 무늬가 생긴 천장을 사진으로 남겨놓을까 망설였지만,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아 사진은 찍지 않았다. 바닥, 찬장 문, 그리고 천장, 순서대로 묵묵히 여기저기 묻어있는 빨간 양념을 닦아냈다. 실내가 건조해서 흩뿌려진 양념이 금세 살짝 말라 손에 힘을 주워 닦아야 했다. 천장에 튄 양념은 대부분 싱크대를 딛고 서서 닦을 수 있었지만, 일부는 팔이 닿지 않았다.


 아이 아빠에게 도움을 구하려면 오후 늦게까지 기다려야 하고, 내가 친 사고는 내가 치우고 싶은 마음에, 다른 의자보다 높은 이삐의 식탁의자를 딛고 올라서 까치발로 남아있는 천장의 양념을 닦아냈다. 그러다 한 순간 중심을 잃었다. 중심을 다시 잡으려면 의자랑 같이 넘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그 짧은 순간 들었다. 그래서 중력이 이끄는 대로 뛰어내렸다. 그랬더니 이삐가 엄마가 잘 뛰어내렸다며 박수를 쳐준다. 그래 네가 내가 십 년 감수했다는 걸 어떻게 알겠니? 아이의 천진난만한 반응에 기분이 좋아졌다. 닦으면서 깨끗해지는 부엌을 보니, 여기저기 튄 양념으로 짜증이 났던 마음이 치유가 되는 듯했다.


빨리 김치를 담가놓고, 잠깐 이삐에게 썰매를 태워주고,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심신이 지쳐서 김치 담는 것도 다음날로 미뤘다. 불행 중 다행인지 친구는 열이 나서 결국 오지 못했다. 그 와중에 손님 점심 준비까지 했으면 조금 벅찼을 것이다. 치우는 중간중간 이것저것 해달라고 요청을 하긴 했지만, 이삐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엄마의 상황을 많이 이해해주고 인내해주었다. 이 믹서기 사고는 생전 처음 겪은 일인 데다가, 이삐의 박수 덕에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결국 마음의 안정을 찾고 막판에 증거를 남겼다.



2019. 2. 3


어제의 난리법석 덕인지 찌뿌둥한 몸을 달래며, 간신히 미뤄둔 김치를 담기 위해 다시 믹서기를 꺼냈다. 믹서기 소리에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뚜껑 꼭 닫고 전원을 빼란다. 은근히 얄미우면서도 귀엽다. 그렇게 이틀에 걸쳐 담은 김치의 양은 겨우 1.5 kg이다. 주로 혼자 먹기 때문에 내게는 넉넉한 양이지만, 이번 김치에 숨겨진 엄청난 노고를 미리 알았다면 그냥 김치를 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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