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 Apr 06. 2023

설마 했지만... 그의 어이없는 행동

그의 허당끼가 사랑스럽다니 나도 단디 미쳤다. 


청소기의 먼지통 사정없이 흔들기


지난 어린이 체스대회의 중고물품 나눔에서 딸이 가져온 작은 체스세트의 폰(pawn)이 사라졌다. 아침부터 그가 딸에게 물건을 잘 관리하라며 언성을 높였다. 그리곤 혹시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진 않았는지 청소기의 먼지통을 살핀다고 본체에서 먼지통을 떼서 흔들었다. 순간 흡입구 구멍이 눈에 띄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그 구멍의 존재를 모르고 무식하게 위아래로 흔들진 않을 거라 단정했다. 그러나 그는 내 예상과 달리 빙구였다. 먼지통을 마구 흔들어대 먼지통에 고이 들어있던 먼지가 흡입구 구멍을 통해 튀어나왔다. 


순간 단전에서 올라오는 화를 부여잡았다. 그가 언성 높여 딸에게 하던 잔소리가 거슬렸는데, 그걸 내가 그에게 하려는 게 싫었다. 소리 질러봐야 서로 얼굴만 붉힐게 뻔했다. 그에게 허탈하게 웃으며 청소기 먼지통을 흔들 때 흡입구 구멍이 있는 건 생각도 안 했냐 물었다. 내가 어이없어하며 전공이 이공계인데 그렇게 막무가내로 흔들다니 놀랍다 하자, 그는 자신의 전공은 컴퓨터지 청소기 같은 기계가 아니라며 구멍이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고 했다. 자기 관심 밖 일에는 한없이 무지한 사람이란 걸 깜빡하고 경고하지 않은 나를 탓하며 그에게 먼지통에서 튀어나온 먼지나 잘 치우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는 참 똑똑한 사람이다. 그러나 때론 자기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한없이 모자라고 바보 같다. 제눈에 안경이라고 나는 그의 그런 모자란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어이없지만 사랑스러워서 불끈 솟아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허탈한 웃음으로 무마시키게 만드는 그의 허당끼! 내가 그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의 서투름 덕에 그는 먼지를 치우느라 투덜댔지만, 나는 예전 그의 다른 서투름을 떠올리며 한바탕 더 웃을 수 있었다.



유통기한 지난 콘 또띨라


요리를 귀찮아하는 그가 그나마 자주 만드는 음식이 치즈 퀘사디아다. 콘 또띨라를 프라이팬에 데운 후 반을 접어 그 사이에 치즈와 살사 치포틀레를 넣어 구운 퀘사디아는 단순한 조리법에 비해 상당히 맛있다. 그래서 우린 종종 콘 또띨라를 산다. 


어느 날 슈퍼에서 하나 남은 콘 또띨라를 사려다가 유통기한이 지났길래 사지 않고 돌아온 적이 있다. 평상시의 나 같으면 점원에게 말해 선반에서 물건을 치워달라 했을 텐데, 그날은 서두르느라 점원에게 알리지 못했다. 그날 저녁 나는 그 콘 또띨라를 우리 집에서 마주했다. 


장은 주로 내가 보는데 그날따라 그가 슈퍼에 들러서 마지막 남은 내가 집었다 놓았던 그 콘 또띨라를 사 왔다. 당연히 유통기한은 살피지 않았다. 어찌 그를 탓하랴. 서두르느라 점원에게 알리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환불하기 귀찮았던 그는 그 콘또띨라로 치즈 퀘사디아를 만들어먹었다. 그 후론 그가 사 올만한 물건 중에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이 눈에 띄면 점원에게 꼭 알리려 애쓴다. 



무알콜 맥주

 

언젠가 집 근처 가게에서 하이네켄 병맥주를 저렴하게 팔았다. 싼 가격에 홀려 손을 뻗었다가 무알콜 맥주인걸 깨닫고 내려놓았다. 다음 날 그가 그 무알콜 맥주를 사 왔다. 저렴한 가격에 홀려서 무알콜이란 걸 깨닫지 못하고 덥석 사 온 것이었다. 


맥주를 저렴하게 사 왔다고 내게 자랑하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병에 크게 쓰여있는 0.0%의 글씨를 가리켰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무알콜 맥주를 마시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싱겁더라던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무알콜 맥주에 보드카를 섞었다.


설마 무알콜을 눈치채지 못하고 사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해 그에게 말하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그는 내 기대보다 훨씬 더 무심했다. 혹여나 실수라도 그가 살만한 물건이 있다면 미리미리 주의를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알콜 맥주에 보드카를 섞으며 나름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 웃을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른 계절을 사는 우리 가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