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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Sep 15. 2023

오마주와 데자뷔

내 머릿속 언어영역이 고장 났다. 고칠 수 있을까?

배경 이미지 출처: Unsplash



8월 중순부터였다. 종종 나의 영어가 좀 모자라다는 느낌을 받았다. 적확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아 대충 말을 했다. '개떡같이 말해도 너는 찰떡같이 알아들어라.'라는 마음이었다. 함께 한 시간이 긴 그와 주로 대화를 하니 큰 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곧 괜찮아지리라 믿었다. 한국어는 어떨까? 오랜 해외살이에 한국어가 서툴어졌지만 그 정도를 가늠하는 건 쉽지 않다. 모국어라서 대화할 때 미묘한 차이를 느끼는 게 어렵다. 그래서 영어만 서툴어진 줄 알았다.


예전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맞는 단어가 도통 튀어나오지 않아 막막했던 적이 있다. 한국어가 아니더라도 영어라도 괜찮다 싶었지만, 나의 뇌는 단어들이 쌓여있는 섬으로 향하는 다리가 끊어진 것처럼 단어들을 물색하지 못했다. 저 건너에 확실히 내가 아는 꼭 필요한 단어들이 있는데, 끊어진 다리 앞에서 하염없이 발만 동동 구르는 느낌이었다. 몽실몽실한 느낌 또는 감정을 선명하게 그려내지 못해 생각들이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사라졌다. 나 자신이 기계의 작은 부품 하나가 고장 났는데, 그 부품이 없어서 고철이 된 기계 같았다. 


머릿속 끊긴 다리를 재건하기 위해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해 책을 읽고 들었다. 환경상 한국어만 고집할 수 없어 영어랑 한국어를 가리지 않았다. 긴 호흡의 책이 부담스러워 다른 방법도 찾았다. 어쩌다 팟캐스트를 알게 되었는데, 영어 팟캐스트는 예상보다 깊이가 있었고 책보단 호흡이 짧아 좋았다. 집안일하며, 산책하며, 장 보며 함께 할 수 있어 더더욱 흡족했다. 더 나아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추억하고 싶은 이야기, 나누고 싶은 이야기, 배출해버리고 싶은 이야기들을 써 내려갔다. 엉망진창인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잃어버린 단어들이 되돌아왔다.


엄청난 위기감이 이야기들을 알아가고 써 내려가는데 몰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때때로 손을 놓기도 했지만 완전히 내려놓지 않는 걸 보면 읽거나 듣고 쓰는 습관을 들인 게 아닐까? 그런데 요즘 모든 게 힘에 부친다. 재밌게 듣던 팟캐스트도 이전만큼 흥미롭지 못하고 오디오북도 끝까지 듣는 경우가 드물다. 책은 더 손에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여름이라고 글 쓰는 것도 3개월간 손을 놓아버렸다. 그래서 8월 내내 영어가 녹슬었다 느낀 것 같다.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간 뒤 더는 글쓰기를 미루고 싶지 않았다. 8월 초부터 부지런을 떨어보자 다짐했지만 이러저러해서 계속 미루다 보니 8월 말이 되어서야 간신히 글 하나를 마무리했다. 9월엔 글쓰기 습관을 다시 들인다는 마음으로 반짝 반짝이던 순간들을 보관하고 싶은 욕심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그런데... 몽글몽글한 생각을 잡아줄 단어가 가끔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어나 영어든 상관없는데... 예전의 악몽이 재현되는 걸까? 8월의 어눌했던 영어는 복선이었던 걸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몽글몽글한 생각이 도망가려는 것을 애써 붙잡는 느낌이다. 


복선이라는 단어도 당최 떠오르지 않아 구글에서 단어를 대충 묘사해 이래저래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급한 맘에 언니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회식이라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러다 문득 예전에 복선이라는 단어를 썼던 짧은 글의 내용이 떠올랐다. 브런치에 썼던 글이었나 싶어 찾았지만 없었다. 혹시 페이스북 담벼락에 있으려나 싶어 검색을 해보니 내가 원하던 그 짧은 글을 찾을 수 있었다. 그 글을 쓰던 감정과 상황들은 떠오르는데 왜 유독 그 단어 하나만 떠오르지 않았을까?


내 페이스북 담벼락의 글


마치 오래된 컴퓨터가 나는 이제 더는 못해먹겠다고 농성을 하는 것 같다. 컴퓨터야 새로 사면 되지만 나는 나를 버리고 새로 장만할 수 없는데 이 일을 어쩌나? 여름 전에는 적당한 한국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대신 영어라도 떠올랐는데... 아들의 비눗방울 기억에 대한 글을 쓸 때 아들이 느낀 게 기시감, 데자뷔라는 생각은 떠올랐는데 이 단어들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오마주가 떠올랐다. 오마주는 존경하는 작가의 작품을 떠올리며 따라 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다른 단어가 있는데 뭐였지? 결국 구글에 의존해 보았다. 검색창에 '비슷한 일 때문에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 '전에 겪은 것 같은 일' 등을 넣어봤다. 두 번째의 검색 문구가 내가 원하던 단어 데자뷔를 찾아주었다. 


덕분에 답답한 마음은 사라졌지만 씁쓸함이 몰려왔다. 안 그래도 한국어가 아닌 영어표현이 떠올라서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글을 쓰는데... 이제는 검색까지 해서 단어를 찾아 글을 써야 하는 지경이라니... 이번엔 어째야 하는 걸까? 요즘은 읽는 것도 듣는 것도 내키지 않는데... 내 이야기를 쓰고 싶긴 한데 언어와 씨름하느라 쉽지 않고... 지금 이 글도 거의 일주일째 버벅대며 쓰고 있는데... 그래도 그나마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애써야 어떻게든 하겠지? 내가 나를 토닥이며 달래야지 그 누가 달래겠냐? 마흔이 넘으면 살아온 지혜로 안정적인 삶을 살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뭔가? 제 생각조차 제대로 표현 못하는 사람이라니... 언젠가 또 비슷한 벽에 부딪히며 기시감을 느끼며 지금을 떠올릴 날을 마주하겠지... 아님 다시 구글 검색을 하려나? 기시감, 데자뷔 단어 찾으려고 애쓰며!



비슷한 일 때문에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
전에 겪은 것 같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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