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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Sep 29. 2023

화 총량 보존의 법칙?

내가 화를 자제하니 그가 화를 낸다.

배경 이미지 출처: Unsplash



2023. 9. 28


목요일, 아이들이 체스교실에 가는 날, 저녁 6시 수업이라 보통 5시 즈음 집을 나선다. 내가 한글학교를 데리고 다니기에, 아이들을 체스교실로 데리고 가는 일은 주로 그의 몫이다. 저녁 5시에나 집에 올 수 있다는 그에게 힘드니까 아이들끼리 체스교실로 보내고 그가 픽업만 하는 걸 제안했지만 괜찮다 했다.


체스교실이 끝나고 집에 오면 저녁 8시라 목요일은 이른 저녁을 먹는다. 아이들에게 4시 반 즈음 떡국을 먹였다. 틈틈이 체스교실 갈 채비도 했다. 아이들의 교통카드, 물통, 오가며 읽을 책, 지치고 배고플 그가 먹을 샌드위치, 집 근처 슈퍼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아이들의 용돈을 위한 공병 영수증까지 챙겼다.


우리 집은 트램 종점인데, 트램이 가끔 운행 스케줄보다 많이 늦어지면 종점까지 오지 않고 다섯 정류장 전에 트램을 돌리는 경우가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가 탄 트램이 종점까지 오지 않았다. 예상보다 늦어진 그가 오면 바로 나갈 수 있도록 아이들을 문 앞에 세워놨다. 딸이 심심했던지 평소 사용하지 않는 걸쇠를 만지작 거리다 걸어놨다. 


급하게 문을 연 그가 문이 열리지 않으니, 문을 두 번이나 세게 잡아당기다 욕을 했다. 누굴 향한 욕이라기보단 그 상황이 짜증 나서 튀어나온 욕이었다. 딸을 타이르다가 그에게 바로 그러지 말라고 강하게 말하자 분위기상 울먹일 때라 여겼는지 딸이 바로 울먹였다. 마음이 급한 그는 자신의 화를 수습하지 못했다. 바로 나가야 할 상황이라 미리 챙겨둔 것들을 그에게 넘겨주고 아이들을 달래며 배웅했다.


그의 행동이 지나치긴 했지만, 지치고 배고프고 마음 급해 튀어나온 반응에 대해 전화로 머라고 해봐야 상황만 나빠질게 뻔했다. 얼굴 마주 보고 대화하고 싶었고, 그에게 머리를 식힐 시간을 주고 싶어 체스교실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들이 아기였을 땐 난 아직 에너지가 넘쳐서 불같이 화를 잘 냈다. 그는 차분하게 나를 진정시켰다. 그땐 우리 집에 큰 소리 내는 사람이 나였다. 요즘 내가 에너지를 아끼느라 화를 자제하니 그가 곧잘 버럭 한다 만성피로에 스트레스까지 쌓이고 쌓인 그가 차분함을 잃어가고 있다. 무슨! 집안에 화 총량 보존의 법칙이라도 있는지... 설마 그가 갱년기인가?


시간이 좀 지나자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엔 그의 피로와 미안함이 녹아있었다. 굳이 나중에 대화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걱정 말라며 딸과 잘 이야기하라는 답을 보냈다.


Thanks fo the bun and sorry for being angry. Been a lot on my neck today, then I hurry home, tram doesn't serve, my key falls off the chain and I don't have any break before heading out again.


no worry. I understand everything, but no cursing to kids plz. I love u. Talk to Ida nicely.


잠시 후 투덜투덜 일상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그, 내가 아는 친근한 그로 회복한 것 같아 귀여웠다. 그가 조금 더 여유로왔으면 좋겠는데... 다른 날과 달리 일찍 코 골며 자는 그가 안쓰러웠다. 이 사람아~ 힘내! 내가 그 짐을 좀 더 나눠가야 하는데 미안해...


그가 10년 전에 내게 했던 이야길 돌려주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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