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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Oct 11. 2023

그는 책을 읽지 않는다! 읽는다?

책 읽던 그가 매력적이었는데... 여전히 무언가를 많이 읽긴 하는데...

배경 이미지 출처: Pexels



도서관카드에 대한 이야기를 끄적이다 보니 불현듯 그가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는다는데 생각이 꽂혔다. 학위 수집가인 그는 대학을 떠난 적이 없다. 학생이었거나 선생이었고, 둘 다인 시간도 상당했다. 추측컨대 그는 예전에 학생이기만 하던 시절 대학도서관카드를 발급받았던 것 같다. 그때는 도서관을 이용했을 것이다. 뜬금없이 도서관카드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대학도서관카드가 있긴 한데, 그 카드가 사용가능한지 모른다 했다. 본인 직장의 도서관을 안 가본 지 오래인 것이다. 그는 드물게 우체국 가는 길에 나나 아이들이 빌려온 책을 반납하러, 또는 내가 가족을 끌고 갈 때 동네 도서관에 간다. 간혹 빌리고 싶은 책이나 영화가 있으면 내 도서관카드로 빌린다. 그렇다! 그는 헬싱키시립도서관카드가 없다.


그러고 보니 요즘 도통 그가 책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내 기억 속 저편의 상콤한 서른 살의 그는 버스에서 자주 책을 읽던 남자였다. 편도 30분이 넘는 그의 통근시간은 핀란드 기준으로 꽤 긴 편이었다. 버스에서 책을 읽으면 멀미를 하는 나는 버스에서 꾸준히 책을 읽던 이 남자가 매우 지적으로 보였고, 그 성실함이 존경스러웠으며 부러웠다. 그런데 요즘 그가 책 읽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린 아들과 함께 외출해선 아들을 모래놀이공간에 밀어 넣고 근처 벤치에 앉아 책을 읽던 그였는데, 언제부턴가 그의 손에 책이 들려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엄밀히 말하면 그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할 순 없다. 문학작품을 안 읽는 것이지 직업상 연구분야 관련된 무언가를 늘 읽고 있다. 학술논문을 쓰느라 인용할 책이나 논문을 읽기도 하고, 논문을 지도하고 평가하느라 학생들 논문도 읽고, 피어 리뷰 논문도 읽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분야라 책 보다 인터넷 아티클이나 전문 잡지를 챙겨 읽기도 한다. 지난여름엔 MIT 출판사에서 출판 예정인 책의 원고를 리뷰했으니, 그 책을 읽은 셈이다. 때때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기도 하는데, 요즘은 아이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친다고 스페인어로 쓰인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다. 생각해 보니 핀란드어로 번역된 반지의 제왕을 두세 번 정도 아이들을 위해 조금씩 나눠서 매일 꾸준히 읽어주기도 했다.


일에 지치고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지쳐 책 읽을 여유가 없어진 걸까? 내가 반한 그의 모습 한 조각이 사라졌다니! 게다가 미쳐 그걸 깨닫지도 못하다니! 조금 서글퍼진다. 그는 여전히 이것저것 많이 읽고 있는데, 그가 책을 읽는다고 하기엔 먼가 찜찜한 이 느낌은 뭘까? 책을 읽는다는 정의는 과연 무엇일까? 책이라는 매체의 정의가 무엇일까? 논문은 책이 아닌가? 잡지는? 인터넷에 있는 전문성 있는 글은? 그럼 인터넷에 있는 이런저런 글들은? 몇 년을 주기로 폭식하듯 책을 읽는 나는 요즘 오디오북을 선호한다. 그럼 오디오북 듣기는 책을 읽는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책을 안 읽는다. 그런데 읽긴 읽는다는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다 보니 책을 읽는다는 정의에 대한 의문만 커져버렸다. 누구 내게 이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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