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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Apr 02. 2019

체스, 아빠 그리고 딸

아빠의 딸을 위한 마음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딸의 "싫어!"

2019. 4. 1



아빠의 체스 덕질, 간략한 소개


멋진 아들이 체스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안 지 1년이 넘었다. 아들의 체스 재능은 아빠의 덕후 본능을 소환하였다. 아빠는 체스 세트나 체스 시계를 아들의 친구들 생일 선물로 준비했다. 이런저런 다양한 스타일의 체스 세트를 구매했고, 더 나은 제품의 구매로 필요가 없어진 세트들은 지인들에게 되팔았다. 체스에 대한 책을 아들과 같이 읽고, 아들을 포함한 지인들과는 물론 온라인으로 체스를 두며, 체스 퀴즈를 아들과 함께 풀었다. 아들이 다니던 유치원과 학교 방과 후 교실에 체스 세트를 사주는 아빠의 독특한 바짓바람도 보였다. 유치원과 학교 방과 후 교실의 체스 피스가 몇 번 없어졌는데, 그때마다 나무를 직접 깎아서 만든 체스 피스를 대체품으로 채워줬다. 근래에는 체스 피스를 만드는 것이 지쳤는지 대체용으로 여분의 체스 피스를 사놨다. 검은 소파 테이블에 은색 시트지를 붙여 체스 테이블로 변신시키는 등 체스를 두기만 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체스 피스나 체스판을 만들거나 수정하기도 했다.



아빠의 삐짐, 그러거나 말거나 시크한 딸!


지난주에 아빠는 아파트 쓰레기를 버리는 곳 (창고 같은 실내)에 누군가 몰래 버려놓은 서랍장 더미에서 얇은 나무판을 주어왔다. 재미 삼아 체스판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빠가 체스판을 그리는 모습을 본 딸이 만들고 있는 체스판을 달라고 했다. 아빠는 온 가족이 체스를 두는 모습을 그리며, 딸에게 체스 피스의 이름과 룰을 종종 알려준다. (세뇌시키고 있다.) 딸의 요청에 원래 시험 삼아 그려보겠다는 계획과 달리 정성을 다해 나무판에 체스판을 그렸다. 다음날 검은색으로 칠해놓은 반쯤 그려진 체스판을 본 딸은 흰색으로 칠해진 체스판을 원한다며 아빠의 마음을 후볐다. 아빠는 이에 굴하지 않고 틈틈이 색칠하고 나무판을 크기에 맞게 잘라 바니쉬를 여러 번 칠해 체스판을 완성을 했다. 딸이 좋아할 모습을 그리며, 소파 테이블 위에 완성한 체스판과 얼마 전에 딸에게 준 체스 피스를 올려두었다.


아빠는 딸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와서 겉옷을 벗자마자 선물이라며 아이를 소파 테이블로 이끌었다. 딸은 대뜸 "En halua (원하지 않아)."라고 여러 번 외쳐 아빠의 마음을 후벼 팠다. 아빠는 딸의 반응에 상당히 삐졌다. 아빠가 받은 상처는 눈치채지 못한 채 딸은 아빠가 오빠에게 준 나무판을 자르다 생긴 30cm 자처럼 보이는 나무 막대기를 보더니 신나게 휘두르며 좋아했다. 남은 나무판을 칼 모양으로 잘라 선물하면 딸이 정말 좋아할 것 같다 하자 아빠는 싫다고 짜증을 부렸다. 반응이 유치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돼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얼마 뒤 아빠와 나란히 앉아서 아빠가 선물한 체스 피스와 체스판을 만지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을 봤다. 맘이 풀렸냐고 묻자, 아까는 딸이 배고파서 힘든데 아빠가 체스 두자고 하는지 알고 싫다고 한 거 같다며, 딸이 자신의 선물을 잘 받아주었다며 한결 밝아진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아빠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거 아닐까?


쓰레기 더미에서 건진 나무판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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