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집 : 이야기를 모으는 자 -24-

파란 길에서

by 이사금

#024. 파란 길에서

ai-generated-8543389_1280.jpg






“…….”


이야기를 하나 끝마쳤건만 남자는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내리 깔렸고,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빤히 여래를 쳐다보았다.


그 시체 같은 눈을 보며 오한을 느낀 여래는 미동 없는 남자의 태도를 보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


“으…! 춥다!”


연지는 어깨를 잔뜩 웅크렸다. 주변은 이상할 정도로 어두웠고, 꼭 물이라도 가득 찬 것처럼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연지를 둘러싼 어둠은 밤의 어둠이랑도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연지의 시야가 일렁거리고 안개가 낀 것처럼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얇은 민소매 티를 입고 있어, 노출된 연지의 어깨를 그의 부드럽고 긴 머리칼이 감싸듯 찰랑거리고 있었다.

“후아-.”


연지는 한숨을 쉬듯 숨결을 내뱉었다. 뭔가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띵했다. 분명 자신은 걷고 있는 것 같은데 몸이 둥둥 뜨는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근데 여긴 대체 어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연지는 그 자리에서 멈춰서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상황을 유추했다.


- 이상하다? 난 분명 친구들이랑 놀다가 해가 질 때 되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그러나 모든 게 알쏭달쏭하고 깊이 생각할수록 기억은 도망치듯 멀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연지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건 마을 뒷산 너머로 붉게 비치던 저녁 하늘의 빛깔뿐이었다.


도대체 어쩌다 자신이 여기로 오게 된 것일까?


연지는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이 길을 잃은 것일까? 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마치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연지는 여기 오기 전의 상황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름을 기억하는 것, 친구가 누구였는지 사는 곳이 어디였는지 기억이 또렷한 걸 본다면 기억상실증 같은 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으… 진짜 여긴 어디야?”


기묘한 추위와 이상한 두려움에 연지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을 했다. 그래서 확실하게 보이지 않음에도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연지가 돌아볼수록 주변의 푸른 어둠과 그 어둠 주변의 기묘한 안개는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연지가 답답하다고 생각하여 걸음을 멈추었을 무렵이다.


몇 발자국 앞에서 연지는 어떤 사람 같은 형태를 보았다. 그렇다. 틀림없는 사람, 그것도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연지처럼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연지의 몇 발자국 앞에 서 있었다.


연지가 다가가고 있음에도 여자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반응이 없었고 옷차림은 그 긴 머리칼처럼 검은 빛깔이었다. 길고 검은 치맛자락 아래로 보이는 여자의 다리는 기이할 정도로 새하얬다.


바람 한 점 안 부는 것처럼, 아니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가만히 있는 여자의 모습은 어딘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고 그 자리에 고정된 것처럼 위화감을 주기까지 했다.


- 다행이야. 사람이 있었어. 저 여자한테 길을 물어봐야겠어!


하지만 연지는 자신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저기요-!’라고 외치며 여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런 연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 고개를 돌리는 동작마저도 어딘가 사람 같지 않은 뻣뻣함이 느껴졌고 이상하다가 생각한 연지가 주춤 물러섰을 때였다.


연지와 여자의 얼굴이 마주쳤다.


“…?!….”


그 순간 연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공포를 느꼈다. 여자의 초점 없는 풀린 눈이, 조각상을 떠올릴 정도로 핏기 없이 새하얀 얼굴이 어딘가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명은 잘할 수 없어도 기괴한 두려움이 연지를 덮쳤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그의 내면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저 여자의 정체는 뭔지 알 수 없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연지는 여자의 시선을 피하며 발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연지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여자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 손 역시 얼굴만큼이나 기이할 정도로 하얗고, 사람의 손 같은 생기는 없어 보였다. 기다랗고 가는 손끝에는 손톱이 길게 자라 위협적으로 보였고 그것이 연지의 공포를 한층 더 불러일으켰다.


연지가 여자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막 움직이려 할 참이다.


어느 순간 연지와 가까워진 여자는 긴 팔을 뻗어 연지의 팔목을 그러쥐었다. 그 손동작은 매우 빨랐고 그 힘은 뿌리치기 어려울 정도로 강했다. 또 이상할 정도로 여자의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섬뜩함이 연지를 사정없이 덮쳐왔다.


“어? 어…?!”


연지는 자신을 놓아달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붙든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고 연지는 생각했다.


지금 연지의 팔을 잡고 있는 건 여자의 손이 아니라 해초처럼 기다란 여자의 머리칼 같았다. 긴 머리칼이 마치 뱀처럼 움직이며 연지의 앞에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 머리카락은 마치 물에 퍼지듯 일렁거리며 주변을 감쌌고 어느새 여자의 몸 자체가 긴 머리칼에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믿을 수 없게도 여자의 머리칼은 길어지고 분열하며 그 존재를 늘려가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 주변을 감싸는 것도 모자라 연지의 몸 자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마치 한자리에 숨어 살다가 촉수로 발견한 먹이를 채가는 해양 생물처럼.


“꺄아아악!”


연지는 기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여자를 뒤덮고 이제는 연지의 몸까지 뒤덮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을 벗어나려고 연지가 버둥거려도 머리카락은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를 더 강하게 옥죄이는 것 같았다.


기어이 그 머리카락은 연지의 얼굴까지 감싸고 그를 저 푸른 공간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 안돼! 안돼!! 난…, 난 집에…! 집에 가야 하는데!!


지금 집에서는 연지의 부모와 언니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집을 나간 지 한참 되었는지 돌아오지 않는 그를 걱정하며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시도하다가 기어이 밖으로 그를 찾으러 나올 것이다. 그리고 견디다 못해 경찰에 신고를 할지도 모른다.


가족들이 걱정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는 연지의 바람은 그렇게 깊은 물속으로 빠져 버렸다.


연지가 어쩌다가 물에 빠졌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연지 본인도 알지 못했으리라.


숨이 막히고 몽롱한 의식이 끊어져 연지가 어떤 소리도 듣게 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물 위로 떠오른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물 밖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여자 시체가 떠올랐다고 소리를 쳤다.


연지의 시신 주위에는 다른 존재는 없었다. 물살에 흔들리는 긴 머리칼의 여자는 오로지 연지뿐이었다.

이전 23화괴담집 : 이야기를 모으는 자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