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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수 Jun 23. 2024

6화

당신은 자신에게 진정한 친구입니까? 

당신은 자신에게 진정한 친구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에게 좋은 친구입니까? 누가 감히 타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누가 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진정한 친구


'친구'라는 소유하는 세상의 관심사에 꽂혀 어떻게 교수님의 질문에 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다시 강의가 있는 일요일 아침 오늘에서야 겨우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내가 바라는 친구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정한 친구'를 의식하고 간절히 원한 것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같아요. 그리고 지금도 늘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늘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에게 진정한 친구가 있는가?' 내 모든 것을 나눌 우정이 있는가 늘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러나 '소유'의 개념입니다. 가진 것을 모두 내어 주어야 진정한 친구라고 규정합니다. 내가 진정한 친구를 갖고 싶다는 갈증입니다. 때로는 그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자주 만나는 친구나 후배 혹은 선배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진정한 친구는 없다며 늘 내심 좌절합니다. 그들에게 나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면서 그들이 나에게 좋은 친구,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과 혹은 내 어려움을, 그 모든 것을 알아주는 친구이기를 바랍니다. 남편도 친구도 선배도 후배도 동료도 모두가 나와 함께 인생이라는 경주를 함께 뛰어 주지만 나를 위해 자신의 '물 한 모금'을 주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 그들의 마지막 남은 물 한 모금을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주기를 바라고 있나 봅니다. 우정조차도 나는 조건부입니다. 그들이 나에게 그들의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물을 줄 수 있다면, 나도 그들에게 나의 모든 것을 바치리라고 늘 나의 준비된 우정에 도취됩니다. 나는 내가 늘 '최고의 우정'을 준비해 둔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다만 그들이 여전히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마지막 남은 물 한 모금을 줄 '최고의 사람'이 되어 주지 못한다고 한탄합니다. 


나의 우정과 나의 사랑은 여전히 조건부입니다. 영화 친구를 보며 그런 친구를 갖고 싶어 하고, 세상에 떠도는 감동적인 우정스토리에 감동하지만 시샘합니다. 친했던 친구는 멀리 살면서 서로의 삶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사실 더 이상 전처럼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이가 아닙니다. 진정한 친구에서 멀어진 거죠. 새롭게 자주 만나는 지인들은 늘 밥값을 누가 내나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늘 나를 위해 먼저 밥을 사는 친구인지 주판알을 굴립니다. 손해를 보며 누군가를 사귀지 않으려는 생존 습관이 몸에 배었죠. 나도 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이라도 나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을 만나려 합니다. 누군가가 딱하고 힘든 처지에 놓이면 몸이 저절로 멀어집니다. 무언가를 도와주지 않고는 관계가 어려워 짐을 직감하고 스스로도 모르게 멀어지는 거죠. 그러고 보면 직장에서도 모임에서도 집단에서 지탄받는 누군가를 보면 누구나 슬슬 피합니다. 함께 지탄받기 싫다는 계산이고, 가까이하면 손해라는 계산이 깔린 거죠. 복잡한 생존전략이 나와 나의 지인들에게 깔려있습니다. 


이렇게 생존전략과 이해타산이 깔려 있는 관계에서 어떤 진실한 우정 스토리가 탄생할 수 있을까요? 나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없습니다. 늘 먼저 받으려는 본능에 박혀버린 이기심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없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진정한 친구입니까?'라는 교수님의 질문을 적으며 한 번도 질문해 보지 않은 주제라 글을 금세 쓸 수가 없었어요. 오늘이 7강이 시작되는 일요일인데 저는 이제야 6강의 질문을 쓰고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아무리 스스로에게 질문해도 나에게 진정한 친구가 없고, 나는 누군가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준 적이 없습니다. 잠시 잠깐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기는 했고, 그들도 나에게 잠시 잠깐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준 적은 있었네요. 그렇지만 내가 바라는 변함없는 바위처럼 영원한 '진정한 친구'는 없었습니다. 한편 속상하기도 했어요. 그동안 내가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았었나 싶습니다. 지지리 궁상으로 똥머리 질끈 매고 앞섭에 밥풀 묻힌 채 출퇴근과 휴복직을 반복하다가 이제 겨우 나를 위한 매일의 두 시간을 찾아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줄 마음의 빈 공간이 전혀 없었어요. 오직 나를 위해 그 두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새벽시간 두 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사용했어요. 책을 읽었고 사실 글쓰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 아침 두 시간을 위해 저녁에 일찍 잠들었고 사실 학교에 출근해 졸기도 했습니다. 비몽사몽으로 출퇴근을 하기도 했고 집안 정리정돈도 소홀해졌어요. 그래도 나는 나를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 그 두 시간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우정을 얻은 것은 아닌데 나 자신을 얻은 것 같아요. 그렇게 만난 '나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자신감도 조금씩 커졌습니다. 사람들과 만나는 횟수도 많이 줄이면서 나는 독서하고 글을 쓰는 '행복한 시간'을 누렸습니다. 교수님께서 '제2의 자아'를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아를 친구라고, 자아를 우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사실 아직 얼떨떨합니다. 제2의 자아, 즉 나 자신에게 좋은 친구입니까라니 이게 무슨 뜻일까? 과제를 파악하는데도 오래 걸렸고, 영문을 몰랐고,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어요. 


분명 다윗은 요나단과 미갈이라는 생명을 걸고 그를 도와준 사람이 있는데 왜 교수님은 '제2의 자아, 자신에게 좋은 친구입니까?'라는 질문으로 고쳐 쓰신 것일까 의아합니다. 내 안의 자아가 그만큼 구체적이지 못해서일까요? 요나단과 미갈은 제2의 자아를 연마한 다윗에게 필연적으로 오기로 약속된 친구라는 말씀인가요? 친구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분명 이기심입니다. 그러니까 귀인을 바라는 마음인 거죠. 나의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선물해 줄 귀인, 즉 로또를 바라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나에게 올 리가 없죠. 로또를 바라며 매일 로또명당에서 줄을 서서 로또를 산들 나에게 로또가 올 리는 만무하니까요. 로또가 행여 당첨되었더라도 담을 그릇이 못되니 오나마나이기도 합니다. '갈망하는 마음', 진정한 친구를 바라는 마음은 결핍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없습니다. 나는 진정한 친구를 기다립니다. 갈망합니다. 


진정한 친구는 갖는 것이 아니라, 되어 주는 것


결국 내가 먼저 사랑해야 사랑을 얻듯, 내가 먼저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지 않고는 진정한 친구는 없음을 인정합니다. 사랑받기를 갈망하기보다 사랑하면 되는 것이고, 진정한 우정을 갈망하기보다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 되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괴로운 갈망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결국 평생 내가 해야 할 일은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진정한 친구가 될 만한 그런 사람이 되어주는 것인가 봅니다. 


늘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교수님, 늘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좋은 질문으로 사람들을 깨워 주세요. 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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