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우리가 하루를 살 때 그 하루에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도서관 반납일이라는 알림이 오는 날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해야 하고 아이의 치과 정기 검진 예약 날이면 아이를 데리고 치과에 가야 한다. 쌀이나 계란이나 우유, 파, 마늘, 양파 등 음식에 꼭 필요한 소중한 재료들이 떨어지면 반드시 마트에 가서 재료를 사서 냉장고를 채워 넣어야 한다. 음식물이나 화장실 쓰레기도 제때 치워야 한다. 먹을 것을 먹고 난 후엔 설거지도 바로바로 해야 한다. 자취를 했던 한 친구는 설거지를 바로 안 하고 며칠을 설거지 통에 그대로 두곤 했었단다. 그러면 탄수화물이 굳어 딱딱하기를 지나 흉기가 되는 일이 생긴다고 했다. 자기는 밥풀에 손이 여러 번 베어 봤단다.
이러한 일들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아도 꼭 해야 하는 일들이다. 만약 이러한 일들이 제 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이들의 이가 썩을 수도, 집이 쓰레기통이 될 수도, 먹을 것이 없어 굶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일상의 어느 부분에서건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혼자 살면 안 해도 되는 일들도 있겠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더 바삐 움직여야 하는 날들이 많다. 그런데 집안 가득한 먼지를 청소기로 빨아들이거나 화장실 쓰레기를 치우거나 아이들 병원 정기 검진 가서 병원에서 멍하니 순서를 기다릴 때, 하긴 하는데 내적 에너지가 넘쳐서 하는 일이라기보다 그저 부모로서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할 때가 많다.
반대로 마음속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할 때는 새록새록 에너지가 솟는다.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거나 모처럼 영화관을 가기로 약속했을 때,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좋은 곳으로 가는 일들은 반복되는 일상에 새로운 활기를 주는 특별한 이벤트들이다. 그리고 시끌벅적 정신을 쏙 빼는 아이들로부터 벗어나 혼자 외딴섬이라도 갈 수 있다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이다. 굳이 외딴섬까지 가지 않더라도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즐기며 홀로 여유로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다면 바닥까지 내려갔던 에너지가 솟아 나올 것이다. 그런 때는 졸린 눈과 멍한 표정이 반짝이는 눈과 활기찬 걸음으로 바뀌고 마음도 날아갈 듯 가볍겠다.
굳이 일상을 등급을 나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처럼 일상에 새로운 영감을 주는 순간들에 최고 등급을 주려 하지 않을까. 그런데 반대로 우리네의 일상을 뒤집어 탈탈 털어 보자. 등급을 나눠 내가 최상 등급으로 메기고 싶은 일들로만 나의 일상을 채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끌벅적한 아이들로부터 탈출해서 한적한 카페로 갈 필요도 없는 외딴섬. 누군가 나를 위해 시중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그들이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커다란 빔 프로젝트로 영화를 보고, 먼지 하나 없이 치워주는 나만의 공간에서 글을 쓰고,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설거지 건 쓰레기 치울 일 없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하루 종일 산다면, 항상 기쁘고 즐거울까? 그렇게 날마다 지낸다면, 어느 순간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몸이 비대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tv 드라마라면 모를까, 우리네 일상은 그렇게 될 일은 없다. 오히려 우리네 일상은 지치고 힘든 일들의 연속이다. 주부라면 좀 전에 식탁을 닦았는데 아이가 우유를 흘린다던가, 각종 오물의 냄새로 역한 쓰레기를 치워야 한다든가, 아파트 공동 음식물 쓰레기 통에 쓰레기를 비워야 할 때 이런저런 찌꺼기들이 이미 가득 찬 통을 지켜보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든가, 아이가 아프다던가, 별 일 아닌 일로 아이들이 싸운다던가. 또는 도서관 책 반납 때 새로운 책을 빌리려 목록들을 잔뜩 가지고 갔는데 그날이 도서관 휴관일이라 반납만 하고 와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 힘이 빠지기도 한다.
직장인이라면 고객들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때로는 직장 상사로부터 능력의 최고치를 발휘하도록 요청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 능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그로 인해 상심할 수도 있다. 이처럼 반복되는 일상들을 채워가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고 바쁘게 산 것 같으나 그다지 보람차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순간도 많다. 먹을 것을 잔뜩 먹어도 허기진 느낌이랄까. 어떤 날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루를 꽉 채워 살았는데 뭘 하고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의 장소에서 우리는 반짝이는 것들을 경험한다. 차가운 날씨에 물을 따듯하게 데워 찻잔에 따라주는 아이들의 수고에서, 직장에서 돌아오는 아빠를 기다리려 문밖에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의 기다림에서, 창밖에서 들어오는 오후의 한줄기 햇살 속에서, 비 내리는 날 우산 밑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에서, 생각지 않았던 사람의 안부 메시지에서, 듣고 싶었던 음악 속에서, 그리고 읽고 있던 책의 보석 같은 문장들 속에서.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일상. 해야 할 일들이 하고 싶은 일들과 일치한다면 금상첨화지만 사람들 중에 이 둘이 일치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해야 할 일을 안 할 수 없고, 하고 싶은 일들을 먼산 보듯 제쳐 놓고 살 수도 없다. 우리의 내적 에너지는 사실, 해야 할 일들에서보다 하고 싶은 일들 쪽에서 나오니. 하지만 산다는 것은 이 모두를 아울러야 한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의 경계는 참 미묘하여 그 둘을 갈라 편을 나누기 쉽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내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만드는 과정과 또 그것을 만들어 서로 나누어 먹는 중에 잔잔한 행복감이 마음속에 깃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상을 등급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일상이라 부르는 하루하루는 어쩌면 어린 시절 즐겨하던 보물 찾기와 같은 것이리라. 보물은 오롯이 그 쪽지를 발견하는 사람의 몫이다. 어떤 순간, 어떤 공간에서 보물의 번호가 적힌 쪽지를 발견할지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도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서의 일상 속 어딘가에 숨겨진 번호 적힌 쪽지를 발견해가며 하루만큼의 걸음을 걷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