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나는 학창 시절 도시락을 싸서 학교를 다녔었다. 엄마는 하얀 밥과 짜디짠 검은 콩자반, 고추장을 넣어 버무린 붉은 오징어채 같은 반찬들을 주로 싸 주셨다. 그런데 나는 그 반찬들이 마뜩지 않았다. 엄마는 아마도 먹을 것들이 귀했던 때 먹을 수 없었던, 자신이 좋아했던 반찬들을 싸 주었을 수 있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콩자반이나 오징어채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에게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다른 반찬을 싸 달라고 하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아이들을 키우며 반찬을 만들다 보니 반찬이나 음식의 종류나 가짓수가 옛날 엄마가 해주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에게 계란 프라이를 예쁘게 만들어 주기 위해 계란을 8개나 해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었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계란 프라이의 모양이 왜 중요한지 모른다. 아이들에게 계란 프라이를 그냥 준다. 안 먹으면 네 손해라는 인식을 심어준 우리 아이들은 두말없이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자신은 버섯을 안 먹겠다고 선언했다. 버섯의 물컹거리는 것이 싫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버섯은 싸고 맛있고 영양도 많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고, 게다가 조리까지 간단하여 웬만하면 우리 집 요리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나는 아들에게 엄마가 요리하는 한, 그런 경우는 없으니 그냥 먹으라 했다. 그래도 아들은 카레든 볶음밥이든 된장찌개든 어떤 음식에서든지 버섯을 골라냈다. 나도 오기가 생겨 버섯을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잘게 다졌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마치 공항 보안검색대를 지키는 사람처럼 예리한 눈으로 버섯을 골라내기를 여러 차례. 엄마와 신경전도 여러 번을 거쳐 결국 우리 집은 버섯이 사라진 채 몇 년을 지냈다. 지금은 나 혼자라도 먹으려 사 오지만 말이다.
내 속에서 나온 아이들은 내 속에서 내가 먹는 음식을 먹으며 나와 함께 잠도 자고 내 말소리를 들으며 함께 움직이고 걸었다. 엄마라는 내 존재를 넘을 수 없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10개월간 서로를 공유하며 그렇게 자라 세상으로 나왔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나와 같은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엄마와 달랐던 것처럼 아이들도 나와 다르다. 아이들과 함께 하면 함께 할수록 아이들은 나와 남편을 닮은 부분도 있지만 참 안 닮은 부분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 배에서 나온 형제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서로 너무 다르다.
무엇이든 맛있다를 연발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버섯과 호박, 양파 같은 야채 검색을 강화하며 음식을 대하는 아이가 있다. 갈치를 먹을 때 모든 가시를 다 골라낼 때까지 밥을 한 숟가락도 들지 않는 아이는 그 덕에 밥은 항상 차게 식혀 먹는다. 반대로 갈치를 구우면 재빠른 손놀림으로 생선살을 기막히게 발라 밥을 금세 먹어 치우는 아이도 있다. 고기류는 쇠고기를 특별히 더 좋아하는 아이도 있고, 닭고기를 더 좋아하는 아이도 있다.
어떤 아이는 된장을, 또 어떤 아이는 버섯을 끔찍이 싫어하고, 어떤 아이는 수박과 망고를 좋아하고 어떤 아이는 상큼한 딸기를 좋아한다. 또 어떤 아이는 치즈를 영혼 깊이 사랑하고 어떤 아이는 라면을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사랑한다. 또 어떤 아이는 김치를 참 좋아하는데 어떤 아이는 김치를 싫어한다. 또 어떤 아이는 진밥을 좋아하고 어떤 아이는 된밥을 좋아한다.
또 아이들은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만 안 먹을 수도 있다. 또한 먹고 싶지 않은 것은 먹지 않을 권리도 있다. 내 속에서 나왔지만 내가 아이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명령할 수 없는 독립된 존재들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것을 주장할 자유가 있다.
문제는 내가 아이들의 요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때로는 아이들의 요구가 나의 생각과 맞지 않아 몇 날 며칠 서로 이야기할 때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거절할 때도 많다. 하지만 아이들이 클수록 아이들을 제한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 결국 아이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자신들이 함께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살아 나가는 사람으로 커간다.
사람은 그 안에 우주를 담고 있다. 이처럼 우주가 담긴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아이들 각각의 음식에 대한 기호를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이들을 이해하는 폭이 조금은 넓어지게 된 듯하다. 좁았던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 그만큼 그 사람을 받아들이기가 쉬워진다. 그렇게 우리는 이해하며 사랑을 배워가나 보다.
한 배에서 나온 아이들의 음식에 대한 기호만 놓고도 좋고 싫은 것이 이렇게 다 다른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가 얼마나 다른 존재들일까. 또한 우리는 얼마나 상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며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