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지난 2년. 코로나 시기. 감사하게도 우리 집에 확진자 없이 잘 지나갔다. 그런데 지난 3월 9일. 기숙형 대안학교를 다니는 첫째, 둘째에게 연락이 왔다. 학교에 확진자가 있어 신속항원 검사를 하고 집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으나 몸이 많이 힘들고 무력하다고. 설마 했으나 코로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
처음 소식을 접했을 당시, 마음에 두렵고 떨림은 없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익숙했던 그 이름과의 동거를 얼마나 오랜 시간 기다렸던지. 이제는 긴장이나 두려움 없이 그저 담담했다. 확실히 초기보다 마음의 경계가 풀어진 것이다. 오히려 잘 됐다고. 그냥 이번 기회에 다 함께 앓고 지나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운 마음이 몰려왔다. 온 가족이 무사히 잘 이겨낼 수 있을까. 병원에서는 확진자를 만날 때 방호복을 입고 만난다던데. 집에서 그런 방호복을 갖춰 입고 아이들과 마주쳐야 하나. 남은 아이들 학교는 어떻게 하나. 나머지 아이들을 학교에 다니게 하려면 우선 두 명을 격리해야 했다.
우리 집 안방에는 보통 아파트들처럼 화장실이 딸려 있다. 코로나가 없던 시절. 그 방은 우리 집에서 가장 넓다 보니 셋째와 넷째가 함께 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만약 그 시기에 우리 집 사람들 중 하나가 코로나에 걸릴 경우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까지 격리해서 지켜볼 방이 없었다.
그래서 긴급 가족회의를 통해 안방을 엄마 아빠가 쓰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격리실로 만들겠다는 플랜을 공유했다. 남자아이는 그때로부터 작은 방을 홀로 쓰게 되어 기뻐했지만, 나머지 세 명의 여자아이들이 좁은 방을 나눠 쓰게 되어 불편함이 많았다. 그리고 그럭저럭 시간이 흘렀다.
두 딸은 집에 오자마자 큰 방에 자신들의 짐을 풀고 자체 격리를 했다. 동생들도 각자 방에서 지내며 서로의 접촉을 최소화했다. 우리 부부는 피난민처럼 작은 짐을 꾸려 거실 온수매트 주변에 이불과 짐을 풀었다. 아이들을 만나러 큰방에 들어가야 할 때는 마스크를 썼고 손 씻기를 반복했다. 식기는 뜨거운 물로 소독. 두 딸과 우리의 소통은 전화기로. 그렇게 하룻밤을 지내고 신속항원검사를 하니 양성. 병원서 pcr 검사도 양성이 나왔다.
첫째는 목이 좀 쉬었고 어제 내내 잤다. 둘째는 마른기침을 좀 했고 목이 아프다고 했다. 이것저것 먹을 것 챙겨주는 게 좋았던지 첫째가 계속 이렇게 먹고 자고 살고 싶다고. 몸은 고돼도 마음은 보람찬 돌봄 노동. 이틀이 지나니 나름 아이들 상태가 양호해졌고 아직 집안 내 집단 감염은 오지 않았다. 우선 둘은 항체 형성이 되었겠다 싶어 앞으로 한동안 걱정을 덜 수 있어 감사하다.
어제저녁 물에 데친 시금치 마냥 축 늘어져 있던 첫째에게 무엇이 먹고 싶냐고 물었다. 된장찌개. 생각보다 소박한 대답이었다. 두부 리필과 함께 만족스레 밥을 먹고 감사했다는 딸의 말에 세상 두려운 그 코로나가 우리 집에선 유난 떨지 않고 참 소박하게 지나가는 듯하여 새삼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