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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ay Apr 25. 2022

먹다

헨미 요, <먹는 인간>을 읽고

의도하지 않은 누룽지가 생겼다. 오래된 압력솥의 추가 고장 났기 때문이다. 누룽지를 끓여 김치를 곁들인 아침을 먹고 나니 입 속이 개운했다. 오랜만에 먹은 누룽지는 구수했다. 그런데 만약 누룽지를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누룽지를 먹고 개운하며 구수하다 이야기했을까. 먹을 것이 누룽지밖에 없어 어떤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래도 괜찮고 그래도 감사하다 할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 헨미 요는 일본인 저널리스트이자 시인이요, 소설가, 에세이스트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지독한 회의를 마주한 그는 1992-1994년 그저 세계를 이리저리 방황하기로 작정하고 여행을 떠난다. 이 책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래서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그만의 경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우리는 인류의 '식과 생의 숭고함'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어야 한다.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생명과 관련이 있기에 그 행위 자체도 존엄하다. 그러나 누구나 존엄하게 먹을 수는 없다. 이 책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먹어야 하는 삶의 다양한 이야기들, 즉 생명을 위해 먹기를 멈출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그리고 그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 속에서 인간 존엄과 생의 숭고함이 흘러나온다.




가난을 먹다.

방글라데시 다카. "그건 먹다 남은 음식이에요!" 현지인 모하메드의 말이었다. 다카에는 4대 음식 찌꺼기 시장이 있었다. 사람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파는 시장. 저자는 눈으로 음식 찌꺼기 리사이클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 현지인 모하메드의 안내를 받아 '다카 레이디스 클럽' 뒷문 나무 뒤 어둠 속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결혼식 피로연이 열리고 있었다. 웨이터는 먹다 남은 음식이 있는 테이블을 그대로 가지고 나왔고 사리를 입은 여자 다섯 명이 비닐봉지를 들고 어디선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무거워진 비닐봉지를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나무 뒤에서 본 먹다 남은 음식들은 시장에서 팔릴 것이었다.


인간의 존엄을 먹다

필리핀 민다나오. "어머니도, 여동생도 잡아 먹혔어요." "우리 할아버지도 일본 병사한테 먹혀 버렸소." 1946년에서 1947년 초까지 민다나오 마을 사람들과 주변인들은 잔류 일본병에게 죽임을 당하고 먹혔다. 전쟁은 인간이 한낮 먹을거리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벽으로 둘러싸인 경계 안에서 먹다

독일 브란덴부르크 교도소. 죄인들의 식사는 여느 회사 식당에서의 식사 같았다. 밥을 먹는 남자들이 문신을 새겼다는 것만 빼고. 살인, 부녀자 폭행, 강도 상해 등 말만 들어도 오싹한 죄목을 가진 죄수들의 식사도 담장 밖 여느 사람들의 식사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우적우적 게걸스럽지 않게 그저 오물오물" 씹어 먹는 류의 "어떤 다정함이 빠져버린" 점심이었다.  


전쟁 중에도 먹다

소말리아 모가디슈. 기온 37도. 주운 나뭇가지를 이용해 난민 캠프에서 스파게티를 삶는 여인. 이 여인이 만드는 스파게티에는 소스가 없다. 면뿐인 스파게티를 삶아 국수만 먹는 아이를 본다.


먹일 것이 없어서 먹이다

우간다 캄팔라에서 빅토리아 호수를 따라 트랜스 아프리카 로드를 달리며 본 마을. 바나나 밭이 황록색으로 일렁이는 인구수 83만 명의 마사카라는 지역은 12만 명의 아이들이 부모 중 한 명이나 모두를 에이즈로 잃었다. 당시 총인구수 1700만 명 중 9퍼센트의 감염자가 있었던 우간다. 에이즈에 감염된 엄마는 가난했다. 그래서 아기에게 먹일 안전한 우유를 살 수 없었다. 수직감염이 될지라도 모유라도 먹여 아이를 살려야 했던 엄마. 그녀는 모유 대신 먹일 것이 없었다.


어쩔 수 없어 먹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1986년 4월 사고 이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는 유출을 막기 위해 콘크리트로 뒤덮였다. "1991년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전면 폐쇄를 결정했다. 그러나 에너지 부족을 이유로 1993년 10월 다시 재가동" 되며 시설이 유지되었다. 사상 초유의 경제 위기를 맞은 그 당시, 월간 인플레이션이 50퍼센트를 넘었다.

저자는 취재를 위해 식당을 방문했다. 주방장은 음식 재료를 키예프에서 가져오니 괜찮다고 말했다. 식당 여기저기서 괜찮다는 말을 100번이나 들을 정도로 사람들은 괜찮다는 말을 연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오렌지빛으로 변한 방사능을 뒤덮은 숲은 이전에는 검푸른 빛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나는 버섯, 생선 등은 반감기가 30.2년이고 인체에 유해한 세슘 137 포함되어 있어 먹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곳을 찾아 여기저기로 전전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노인들은 어쩔  없이 "괜찮다" 연발하며 그곳에서 나는 버섯을 먹고 있었다.




여행은 관광과 다른 의미가 있다. "관광은 현지인의 삶과 유리된 재현된 퍼포먼스를 구경하는 것이라면 여행은 객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동참해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관광은 경계 안팎을 비교하지만, 여행은 비교하지 않고 이해하려 한다... 여행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지 주민들의 입장에서 경험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이영민 <지리학자의 인문여행>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헨미 요는 다른 말로 이렇게 그의 여행의 기억을 더듬는다.

이상하게 보여도 이상한 음식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가는 곳마다 먹는 인간이 있고, 지금 그 음식을 먹는 데는 넘치도록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둘러싸고 알려지지 않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오로지 그 인간극의 핵심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나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지나치다 싶을 만큼 유별나게 먹고 마시기를 되풀이했다. 나는 그 주인에게서 기억을 나눠 받아먹었다.(p346)


저자는 현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여행 후에 남겨진 이야기를 그만의 시각으로 우리에게 책으로 써서 전했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이전에 저자가 경험한 이야기이기에 현재의 정보가 아닐 수 있다. 지금은 각 나라마다 더 나아진 상황에 처했기만을 눈을 뜨고 세상을 살피며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제는 세상에 이러한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현실. 우간다의 에이즈 감염자 수가 이전 1990년대 전체 인구수의 9퍼센트에서 2016년을 기준으로 6.5퍼센트로 줄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걸까.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리 나아진 것 없을 듯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지금 우리의 현실에 마음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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