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오늘도 운동 겸 산책을 나갈까 말까 고민했다. 창밖을 보니 그 시간에 밖에 나가면 해의 열기를 온몸으로 다 받아야 할 것처럼 뜨겁고 선명한 햇빛이 위로부터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핑계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리하여 이윽고 집 밖으로 발길을 내디뎠다. 산책하며 아빠에게 전화를 드렸다. 산책 나왔다고 했더니 이 더위에 무슨 산책이냐고 빨리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러게. 난 왜 매일 이 더위에만 움직이는 걸까.' 더워지기 전에 나오면 좋을 텐데 어째 저째 집안일을 다 마치고 나면 그 시간이다.
아빠 말대로 얼른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더운 열기를 헤치며 공원에서 집으로 가는 마지막 풀밭을 지나는 중이었다. 더위에 조금은 지치기도 하고 발걸음도 무거워지던 바로 그때. 내 앞에 한쌍의 꿩이 보였다. 암수 두 마리의 꿩. 그들은 공원을 마치 제집 마당인 듯 거닐며 공원 언저리에서 느긋한 산책을 즐기는 중이었다. 머리에 빨간색이 있는 수컷의 걸음은 늠름했고 암컷은 종종거리며 수컷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더워서 헛것이 보이나? 여긴 어디지? 내가 동물원 왔나? 꿩들은 어디서 온 걸까? 동네 공원에 꿩이라니.’
잠시 생각하다가 다른 곳도 둘러보았다. 인적 드문 곳 어딘가에 다른 동물들도 있을 것만 같았다. 유유한 걸음을 걷는 두 마리 꿩들의 존재만으로도 나를 지치게 하던 더위는 잊히고 내 마음에는 두근거리는 설렘이 생겼다. 그런데 원래 도시화로 아스팔트가 깔리기 전까지는 이곳은 야생 동물들의 집이 아니었던가. 도로마다 자동차가 오가기 전에는 길에 토끼와 다람쥐, 사슴과 커다란 호랑이, 곰도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을 것이다.
현대로 올수록 동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던 곳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서 모든 장소는 사람들만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시점에 공원이란 것이 생겨나 동물들과 사람들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게 되었나 보다. 공원은 사람들이 운동하고 산책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물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안삭처가 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아직 야생에 있으나 갈 곳 없어 방황하는 동물들이 마음껏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집이 있듯 야생동물들이 공원을 집 삼아 도망가지 말고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 그대로 산책의 자유를 누리면 더없이 좋겠다 싶다.
6년 전쯤 이곳에 이사 왔을 때 동네 공원은 그보다 1년 전쯤 지어졌다. 우리 동네는 지금도 아직 시골이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동네에 흙과 수풀들이 무성했다. 산책을 나가면 고라니도 뛰어다녔고, 뱀도 나왔다. 뱀을 보면 흠칫 놀라지만 한 두 번 보면 그러려니 하게 된다. 몸 전체를 용수철처럼 굽혔다 펴며 배 밀고 앞으로 가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다리도 없는 녀석들의 몸놀림은 내 발걸음보다 빠르고 날쌔다. 나는 그들이 두려웠지만 정작 내가 무서워하는 그들은 나를 더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 나타날 때마다 내 눈앞에서 재빨리 사라져 갔다. 내 뒤에 연이어 오던 사람들은 그들을 못 볼 정도로 말이다. 마치 내가 뱀을 보았다고 하면 거짓말 취급당하며 믿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오늘 낮에 본 꿩 두 마리도 그러했다. 사진을 찍어 남겨야겠다 생각하고 그들 앞으로 조금 발길을 옮겼을 뿐인데 인기척을 느낀 장끼는 순간적으로 몸을 날렸다. 장끼가 날 피해 도망가는 걸 보니 인간이 야생동물들에게 참 위험한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씁쓸해졌다. 장끼는 가까운 곳까지만 날았고 그 뒤로는 날지 않고 빨리 뛰어 구석으로 숨었다. 장끼의 발 빠르기가 100미터 달리기 선수 같았다. 갑자기 아이들 어릴 때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전래 동화 생각이 났다. 장끼는 그리 좋은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동화에서 장끼는 아내 말 참 안 듣고 고집 피우는 캐릭터였다. 사람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장끼가 까투리를 내버리고 혼자 냅다 뛰는걸 진짜로 보니 그 마음의 내적 동기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자신의 짝을 보호하기 위해 화려한 자신이 표적이 되고자 저렇게 빨리 뛰는 거라면 정말 멋있는 것이겠지만 자기 살겠다고 저리 혼자 뛰는 거면 참 얄미운 거 아닌가 싶었다. 저들이 말 못 해 인터뷰를 할 수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 숨은 동기를 다 알 수 없으니 판단은 보류하기로 하고.
까투리는 내가 갈 때까지 풀 숲에 숨어 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푸드덕거리며 장끼 반대편으로 날아서 도망쳤다. 말 못 하는 동물이지만 그들이 적을 피해 달아나는 데 나름 전략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야생동물의 경우엔 뭉치면 죽는 것. 둘이 같은 곳으로 피하면 둘 다 죽으니 흩어지는 것을 선택한 듯했다. 욕심부리다가 결과적으로 그들의 여유로운 산책을 훼방하고 말았다. 그렇게 빨리 숨어버릴 줄 알았다면 좀 더 멀리서 그들을 지켜볼걸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후회해 보았자 지난 일. 그들을 봤다는 것만으로 만족이다. 날마다 이런 이벤트가 있으면 산책 가는 길이 꿀맛이겠다. 더운 시간 인적 드문 산책길을 걷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듯. 내일도 한 번 기대해 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