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땅꾸신발 Dec 06. 2022

05. 예민한 성격이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비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투병기

인턴 시절 숙소는 8인 1실이었다. 좁고 냄새나는 침대에는 여덞 명의 지친 의사들이, 일하던 옷도 갈아입지 않은 체로 시체처럼 잠을 잔다. 새벽 4시, 누군가의 전화가 울린다. 전화의 주인은 지쳐서 전화소리를 듣지 못하고 계속 잠을 잔다. 하지만 계속 울리는 전화는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애먼 사람의 잠을 께운다.


그게 나였다. 남들은 전화가 두 통, 세 통 울리는 동안에 잘만 자는데 나는 전화벨이 한 번만 울려도 눈이 떠졌다. 지쳐서 다시 잠들 때도 있었지만 새벽에 잠을 깨는 일이 두세번 반복되고 나면 이제는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도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감고서 제발 잠들었으면 하고 기도하는 일 뿐이다.


나의 청각도 다른 사람들 보다 예민하다. 한 번은 일하던 병원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주파 소음 같은게 계속 들렸다. 하지만 병원의 시설과 직원들은 내 방에 와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녹음도 해 보고 주변의 소음을 최대한 없앤 다음 다시 시도해 봤지만 여전히 소음같은건 안들린다고 한다. 대여섯명이 내 방에 찾아왔었는데 내가 듣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딱 한 명 밖에 없었다. 한 달 넘는 시간동안 시달린 결과 원인을 찾았는데 위층의 육중한 기계가 돌아가면서 내 방 천장에 타일을 고정시키는 금속 구조물들이 떨리면서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였다. 손으로 천장을 거칠게 흔들면 드디어 내가 듣던 소리를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었고, 금속 구조물들의 연결 부위에 윤활유를 꼼꼼히 바르자 드디어 나를 괴롭히던 소음은 사라졌다.


예민함의 정의에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예민한 성격이란 주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 중 중요한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를 무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온갖 사소한 정보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를 말한다. 특히 나는 위의 두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청각적 자극에 매우 예민한데, 진료실 밖의 소음, 윗집이 내는 층간소음들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인간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무시해도 되는 자극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각각 신경을 기울이다 보면 금방 피곤해지고, 스트레스에 취약해진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작은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고 쌓여서 마음을 병들게 한다.


나의 예민한 성격이 우울증의 발병에 얼마나 기여했을지는 솔직히 확실하지는 않다. 오히려 내가 왜 우울증에 걸렸을까 고민하다 보니 깨닿게 된 나만의 특성중 하나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민한 성격은 분명 나의 소화기관에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는 속이 더부룩해진다. 지속되면 속이 쓰리기 시작하고, 내시경을 해 보면 위나 십이지장에 미란이나 염증이 관찰된다. 위액 분비를 억제하는 약을 먹으면 증상이 가라않는다.


예민한 성격이 분명히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환자의 작은 징후를 놓치지 않고 살펴서 큰 병을 발견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마이너스로 작용한다면 그 부분만큼은 개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예민한 것을 자각한 이후부터는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다른 생각을 하면서 관심을 돌리거나, 심호흡을 하거나, 아니면 논리적/의식적으로 그 부분을 무시하려고 한다. 내가 받는 스트레스 수치가 낮은 상황에서는 이런 노력들이 효과를 보지만 피곤한 상태이거나 큰 스트레스가 주어질 경우는 쉽지가 않다. 하지만 전공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매우 관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일을 잘 못하거나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화를 잘 내지 않는다. (가끔은 낸다.) 계속 노력하다 보면, 나이를 먹어 가면서 긴 세월에 걸쳐서 조금씩은 변화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전 04화 04. 우울감 vs. 우울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