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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꾸신발 Dec 12. 2022

06. 방어기제-주지화

비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투병기

방어기제(defence mechanism)는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방어기제란 마음의 평정이 무너져 불안감이 발생한 경우 초자아를 위협하게 되며, 이때 자아가 불안을 처리하고 마음의 평정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심리적 현상이다. 방어기제에는 성숙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분류하기도 하며, 어떤 방어기제를 주로 이용하느냐에 따라 자아의 강도와 적응성을 예측하기도 한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방어기제는 주지화(intellectualization)이다. 이는 불안한 감정과 이성을 분리한 다음, 불안한 마음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울증의 원인을 의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 심리학과 정신의학을 공부하며, 치료의 방향에 대해 나름대로의 결정을 해 나가는 것이다. 브런치에 이 글을 연재하는 과정도 주지화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감정을 분석하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주지화의 맹점은 바로 이성에만 집중한 체로 자신이 느끼고 있는 진실한 감정이 무엇인지를 마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감정과 이성은 인간의 정신을 이루는 두 가지 축이다.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외부에서만 바라보게 되면 감정이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소위 '알아서 잘하는 아이'였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를 했고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도 단과학원을 다니긴 했지만 종합반이나 과외 없이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서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의과대학에 진학한 다음에도 동아리, 인간관계, 진로를 알아서 결정했다. 인턴 시절 어떤 과를 전공할 것인지 엄청난 고민과 스트레스가 있었다. 내가 처음 원했던 과는 의국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저년차들은 100일 당직이라는 가혹한 수련을 받아야 했다. (아직 전공의 특별법이 없던 시절이었다) 내 인생의 황금 같은 20대를 병원에 바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혹한 수련의 현실을 깨닫고 시선을 주변으로 돌려보았을 때, 이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과들은 다른 친구들이 선점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처음 생각했던 전공이 아닌 모 과를 선택했다. 결정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합격한 이후에 부모님에게는 간단히 통보했다. 나 무슨 과 하기로 했다고. 그 이후의 삶에서도 주요한 결정들은 혼자 고민해서 정했다. 결혼도, 직장도, 아이도. 물론 결혼을 하고 나서 아이를 언제 나을지와 어디에서 우리가 살아갈지는 함께 상의해서 결정했다. 전문의가 되고 어디서 일을 할 것인지와, 병원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들을 해결하는데도 배우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으로는, 이것은 나의 문제기 때문에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더 깊은 곳,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미아와 같았다. 확신을 가지고 선택을 한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 결과가 두려웠다. 누군가 이야기를 해 주기를 바랐다. 너는 잘했다고. 옳은 선택을 했다고. 지금 너의 삶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우울증을 겪으면 자아존중감이 낮아지고 불안이 고개를 든다. 지금까지는 괜찮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선택들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증상이 심할 때는 우울증에 걸린 것 자체가 나의 선택의 실패를 상징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힘든 일을 하면서도 잘만 살아가는데 나만 잘못한 것 같았다. 이런 나의 불안과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지식화를 이용했다. 우울증도 '내가' 해결하려고 했다.


주지화의 맹점에 관해 알고 난 다음에야 나는 나의 감정과 불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무서웠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쓰나미에 휩쓸려 깊은 어둠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누군가 나를 붙잡아 줬으면. 나를 안아주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그때 가족이 생각났다. 나의 배우자, 나의 아이. 내가 원하면 언제나 나를 안아줄 사람들. 지금 치료를 받는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도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는 개인적으로 아는 정신건강의학과 형에게도 전화를 했다. 형은 잘 전화했다고, 힘들었겠다고 말하면서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이 사실을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고 2년이 지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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