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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꾸신발 Dec 13. 2022

07. 우울증을 이겨나갈 용기

비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투병기

얼마 전 나는 첫 번째 단약 시도에 실패했다. 병원에 가는 날을 놓쳤고, 남은 약이 없었다. 증상이 거의 호전되어 이 기회에 단약을 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처음 1주일은 잘 보냈다. 이제 이렇게 우울증과 이별하는가 싶었다. 일주일 후 급히 잡은 외래에서도 자신만만하게 주치의에게 말했다. 나 이제 괜찮아진 것 같다고. 약을 더 줄여도 될 것 같다고.


하지만 2-3일이 지나고, 몸속에 남아있던 약물의 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증상이 시작되었다. 우울증으로 치료받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우울증 약은 바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수개월의 시간이 걸려서 천천히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다시 느낀 우울증 증상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긴 터널을 이제는 벗어난 줄 알았는데.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겨우 빠져나와 닻을 내리고 뭍으로 올라가는 줄 알았는데. 다시 시작이다. 다시 시작이다. 다시 시작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동안 잠잠했던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절망감, 막막함, 치료에 실패했다는 좌절감, 슬픔, 초조,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나의 치료에 관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세히 말하지 않았었다. 그냥 우울증이 좀 있고, 약 먹고 있고, 지금은 좀 나아진 상태다. 여기까지가 주변인에게 전한 정보의 전부였다. 하지만 감정의 폭풍우 속에서 나를 튼튼히 잡아 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배우자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지금은 내가 좀 힘든 상태라고,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다시 약을 먹어야 할 것 같다고. 알고 지내던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에게도 연락을 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술을 마시면서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는데 단주를 시작하였으니 더 빠르게 회복이 될 거라고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 힘들지만 잘 참아 보자고. 인턴/전공의/펠로우 시절, 끝이 없는 일을 해 나가면서도 결국은 그 시간들을 지나왔듯이 시간이 지나면 지금을 추억할 날이 올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용기를 준다.


아직은 힘이 들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가 같이 이 시련을 이겨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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