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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꾸신발 Dec 24. 2022

09. 잡설

비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투병기

오늘은 특정한 주제 없이 그동안 들었던 생각에 관해 짧게 써 보려고 한다.


1. 기성세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MZ세대에 있어서는 자신이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은 이제 부끄러워하거나, 잘못된 오해를 받거나 하는 일도 아닌 것 같다. 지인들과 연말에 몰린 약속들과 내년에 함께 하기로 했던 여행들을 정리하면서 지금 우울증으로 치료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그러자 의외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치료받은 적 있다' 혹은 '나도 치료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헬조선이라는 젊은 새대의 인식과 코로나의 유행에 따른 단절이 우울증 환자를 늘린 것인지, 아니면 젊은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되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비율이 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주위에 우울증 환자가 생각보다 많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말하고 가까운 사람들의 도움과 응원을 받는 것은 치료 경과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 같다.


2. 최근에 들었던 말들 중 가장 힘이 되는 말은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였다. 나는 얼마 전 지금 일하는 병원으로부터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까지 적어도 큰 실수 없이, 나름 최선을 다해 일을 해 왔다고 생각해 왔는데 예고된 실직은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이성은 나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머릿속에는 계속 '너는 실패했어'라는 울림이 계속 들려왔다. 직장을 유지하는데 실패했고, 내 커리어에 좋지 않은 경력 하나를 남기는 것 같았고, 가족들이 실망할까 봐 좌절스러웠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솔직히 고백하자 모두들 하나같이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남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인정받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3. 그래서 이 기회에 계약이 마무리되고 나면 휴식기를 가질 생각이다. 최소 한 달에서 세 달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금주를 지금처럼 지속하면 3월이 되면 금주 100일이 된다. 보통 석 달이면 음주로 인해 흐트러진 뇌의 호르몬 밸런스가 돌아오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겨울동안 잘 치료를 받으면 3월이 되면 좀 더 기력이 생겨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좋겠다. 그러면 길게 쉬지 않아도 될 것이고 경제적인 부담도 덜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가 지속된다면 나에게는 휴식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조금만 더 버티면 쉴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는 또 조금씩 힘이 나기도 한다. 쉬는 기간을 어떻게 보내 볼까 조금씩 계획도 하고 있다.


4. 가벼운 명상을 시작했다. 앱을 다운로드하고 1년간 정기 구독을 신청했다. 아직 큰 효과는 보지 못하고 있지만 명상이라는 게 일회성으로 하고 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라 운동을 통해 몸을 단련하듯이, 꾸준히 마음의 힘을 기르는 연습을 반복함으로써, 스트레스와 괴로움을 견디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일시호일'이라는 영화를 보고 원작 에세이도 구입했다. 책의 서문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긴 안목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라'. 명상을 하면서 항상 듣는 이야기도 과거에 대한 후회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집중하자였다. 책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세상에는 '금방 알 수 있는 것'과 '바로는 알 수 없는 것' 두 종류가 있다고. 우울증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길은 분명 '바로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노력하고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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