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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eam Mar 23. 2024

 시골이 답

이렇게 살아도 되네 <연재 7편>


  대구 파동에 전세 2천만 원의 깨끗한 사무실 한 칸을 얻었다. 부모님이 지원해 주셔서 마련한 우리의 신혼집이었다. 27평 텅 빈 공간을 절반은 화실로 절반은 생활공간으로 만들었다. 건축가인 남편 친구의 파격적인 디자인에 따라 공간의 중심에 침대와 내 피아노 조율실을 두었다. 그 둘레는 남편의 화실로, 한쪽 구석은 주방으로 꾸몄다. 도로 쪽 전면에 난 창에는 파스텔톤 블라인드를, 옆쪽 창문은 서문시장에서 떠온 천으로 직접 만든 커튼을 달았다. 공간이 아늑해졌다.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공간을 사랑했다.

지금도 그곳을 떠올리면 그리움이 인다.     

 하지만, 임신이 되고 보니 난감했다. 아이가 태어나도 이대로 살 수 있을까?

 사무실 건물은 도로 가에 인접해 있어 한 밤중에도 시끄러웠다. 한 겨울에는 유일한 난방 기구인 팬히터를 최대로 틀어 놓아도 12도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넓은 공간에 휑하니 흐르는 찬기를 피해 나중에는 조율실의 피아노를 바깥으로 빼내고 침대를 조율실 안으로 넣었다. 침대 위에는 전기요를 켜고. 그때는 서로 꼭 붙어 자서 사실 그렇게 까지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참 추웠다.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따로 살림집을 얻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남편이 시골에 가면 어떻겠냐고 했다. 시골에서는 전세금을 빼서 살림집과 작업실을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남편은 경제적인 이유로 제안한 거였지만. 내게 떠오른 생각은 또 다른 면이었다. 우리가 살던 동네는 좁은 이차선 도로 양쪽으로 건물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외곽으로 드나드는 통행차량이 많았다. 시내버스 차고지까지 가까이 있어 밤늦도록 매연과 소음이 심했다. 어릴 때부터 그런 것에 민감했던 나는 시골에 가면 조용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 수 있겠다 싶었다. 딱히 도시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도시를 떠나는 거에 대해 별다른 미련이 느껴지지 않던 우리는 쉽게 시골 행을 결정했다. 

 어디로 가지? 전세금은 쉽게 돌려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보내던 어느 날 아침, 임신 초기다 보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친정에서 하룻밤 자고 온 참이었다. 주차하고 집에 들어가려는데, 우리 집이 있는 건물이 뭔가 좀 이상해서 주춤했다. 자세히 보니 우리 집 아래층의 도로 쪽 전면 유리창이 시커멓게 뻥 뚫려 있었다. 가스레인지를 켜 두고 방치해서 불이 난 거였다.  그것도 한밤중에. 

백화점에 납품하는 의류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던 곳이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물이 흥건하고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아찔했다. 우리가 불났을 때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면! 의류가 타는 연기만으로도 질식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집을 떠나 있게 해 우리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준 것은 곧 태어날 아이였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복덩이!     

 건물 4층에 살고 있던 집주인은 깜짝 놀라 앞으로는 살림 사는 세입자를 들이지 않기로 결정하고 우리에게 나가달라고 했다. 이미 나갈 계획을 하고 있던 우리는 대구 인근의 촌집을 알아보고 있던 터였다. 두어 군데 보고 있었는데 엄마가 벼룩신문에 난 집을 보여주셨다. 주방도 입식으로 고쳐져 있다 하고 평수나 가격도 우리에게 적당했다. 더구나 예전에 교회 야유회나 대학 MT 갔을 때 공기도 맑고 물이 너무 깨끗해 이런 곳에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청도였다. 집을 보러 갔다.      

 대구 파동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거리였다. 뒤쪽에는 작은 산을 등지고 집 앞에 농수로가 흐르며, 시야에 걸리는 것 없이 시원하게 논밭이 펼쳐진 전경. 12월 말이었는데, 겨울에도 햇살이 따뜻하게 보듬어지던 양지바른 작은집이 우리는 마음에 들었다. 따져보고 흥정해보고 할 생각도 없이 바로 계약을 했다. 모든 일은 마치 예정이라도 된 듯 차례차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집을 일부 수리하고 짐을 옮겼다. 파동 집은 원래의 아무것도 없던 공간으로 돌려놓아야 했다. 우리만의 공간으로 정성 들여 꾸몄던 벽과 바닥을 모두 다시 뜯어내며 마음이 아팠다.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면 어쩔 수 없는 부분. 

 다음 해 1997년 1월, 설을 쇠고 난 뒤 뱃속의 5개월 된 아이와 함께 우리는 시골로, 우리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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