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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Aug 09. 2021

노신사의 낭만

  외래 약국에 있을 때의 일이다.


  지역 약국만 하겠냐마는, 병원에서도 참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게 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가지각색으로 인상적인데, 좋을 때도 나쁠 때도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있다. 그야말로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달까. 이런 기억의 단편 가운데, 오늘은 문득 한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하루였다. 나는 투약구에 나가서 최종적으로 약을 불출하는 포지션에서 근무 중이었고. 아마 월요일이나 수요일이었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환자들이 줄을 아주 길게 서고 기다리고 있었던 기억 때문이다. (내가 일하는 병원은 무슨 이유에선지 월요일과 수요일이 유독 붐빈다.) 사실 병원에서 약을 받아가는 환자들은 이미 약을 오랫동안 복용해 온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무어라 설명을 좀 드릴라치면, “됐어요, 10년째 먹고 있어요”라며 약 봉투를 휙—하고 들고 가기 일쑤다. 일하다 보면 점차 신속해지고, 빠른 회전율(?)을 유지해서 환자의 컴플레인 — 뭐 이렇게 오래 걸려요? — 을 줄이는데 도가 트는 이유다.


  그날도 어김없이 제 주인을 만나길 기다리는 산더미 같은 약 봉투들을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들려 보내던 중, 드디어 그 할아버지 차례가 됐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환자 이름은 OOO이구, 우리 마나님이셔. 지금 2층에서 또 무슨 진료를 보느라구.”

“아, 그러세요. 혹시 생년월일도 아실까요?”

“OO년 OO월 OO일이오.”

“네, 어머님 약 다 조제되어서 나왔구요. 지난번에 드시던 약이랑 같으시네요?”


  녹음된 것마냥 비슷한 패턴의 문장들을 하나씩 뱉어내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말하셨다.


“저기 약사 선생님, 나하고 사기 좀 칩시다!”


  사기? 같이? 영문 모를 말에 화들짝 놀라 처방전만 내려다보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베레모를 쓴 나이가 지긋한 노신사 분이 빙그레 웃고 계셨다.


“사기요?”


깜짝 놀란 내가 되묻자, 할아버지께서는 손을 저으시며 말하셨다.


“아니, 그 뭐야. 나쁜 사기는 아니고. 작당을 좀 해달라는 말이지.”


사연인즉슨 이랬다. 할아버지의 소중한 ‘마나님’이신 환자분이, 식사를 통 시원찮게 하신다는 거였다. 밥을 좀 많이 드시라고 채근해도 입맛이 없다며 한사코 소식(少食)을 고집하신단다. 당신 말은 듣지 않아도, 전문가 선생님 말은 듣지 않겠냐며 말을 좀 해달라셨다. 할아버지의 귀여운 부탁에 절로 너털웃음이 새어 나왔다. 뒤에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던 환자분들도 소박한 사기극(?)에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공모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뭐라고 써드리면 될까요?” 흔쾌히 사기극에 동참하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펜을 단단히 쥐었다. 있는 힘껏 잘 써드리잔 마음뿐이었다.


“아니 뭐, 여기 밑에다가 써 줘요. ‘OOO님, 밥을 많이 드셔야 합니다’ 하고.”


  약 봉투 밑에 OOO님, 식사를 꼭! 넉넉히 하도록 하십시오, 하고 적었다. 이거면 되겠냐는 말에 할아버지는 가만히 보시더니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고맙수다, 선생님! 우리 마나님 건강하게 밥 많이 드시게 해야지.”


  노신사분은 그렇게 유쾌하게 인사하시더니 약 봉투를 들고 훌훌 마나님을 찾아가셨다. 할아버지의 작은 부탁 때문에 시간이 약간은 지체되었음에도 불구, 뒤에서 기다리시던 환자분들도 기분 좋은 한 마디씩을 거들었다. 사랑꾼 할아버지시라면서, 다들 미소를 띤 얼굴로.

  

  부탁을 하신 건 할아버지셨는데, 어째서인지 나야말로 따스한 기운을 건네받았다. 과연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간곡한 마음을 아시고 조금은 더 넉넉히 식사를 하셨을까. 나의 삐뚤빼뚤한 글씨에 담긴 할아버지의 애정 어린 마음은 잘 전달됐을런지. 한동안 약국을 따스하게 데워주었던 노신사의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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