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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Apr 21. 2024

21세기의 문경새재 넘기

청운의 꿈, 그리고

  때는 바야흐로 설 연휴,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보내던 시간을 앞서 보내고 나니 내게는 약 이틀 정도의 말미가 주어졌다. 일이 바빠 좀처럼 쉬지 못하던 때라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가만히 누워 있어 보려고도 했지만… 이미 몸은 꿈틀거려 버렸다.


  하는 수없이(?) 냅다 동네 카페에 가서 여행 계획을 세웠다. 목적지는 문경.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왠지 살면서 문경새재를 한 번쯤은 넘어보고 싶었다. 옛 선비들이 넘어갔다던 길을 나도 넘어보고 싶었나 보다. 찾아보니 문경새재 도립공원을 올랐다 회귀하는 경로는 블로그에 잘 설명되어 있었는데, 문경새재를 넘어 다른 곳으로 빠지는 코스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가 보기로 했다.


  연휴의 새벽은 여느 주말의 아침과는 비교할 수 없이 조용했다. 홀홀히 늦은 밤 싸 놓았던 백팩을 짊어지고 터미널로 향했다. 감사하게도 새벽녘의 버스는 동이 트는 사이에 나를 무사히 문경에 데려다주었다.

문경새재 초입에서

  부지런히 문경새재 도립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따사로운 겨울날을 만끽하고 있었다. 눈이 많이 남아있을까 우려했던 게 무색하게 눈은 몽땅 녹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문경새재 넘기를 시작했다. 느긋하게.

  사실 끄트머리에 길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잘 몰랐지만 어쨌든 길이야 있지 않겠느냐는 심정이었다. 일단 수옥폭포를 목적지로 두기야 했다. 정 길이 없으면 없는 대로 돌아 나오면 되겠다는 안일한 생각의 산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카카오맵과 네이버 지도 모두 4-5시간의 긴 산행을 예고하기야 했지만 결코 길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아무렴 길이야 있겠지.

  다만 믿을 건 오직 두 다리뿐. 그렇게 옛 선비들의 아스라한 마음을 따라, 다만 시험 보는 사람의 조급한 마음만큼은 빼고, 슬슬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1, 2 관문까지는 분명히 옆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3 관문에 접어들면서부터 극명한 2가지 변화를 맞이했다.

  첫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눈이 나타났다. 고요한 설산의 자태가 여실했다. 등산을 잘하지 않던 내게 설산은 낯설기만 한 것이었다. 아이젠을 준비하지도 못했는데… 아차 싶었다. 다행히 눈길이기는 하나 밟은 자리가 많지 않았다. 덕분에 길이 거칠었고 미끄러질 염려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길이 완만했기에 계속 갈 수 있었다.

  둘째. 옆에 줄곧 행인이 있었는데 3 관문이 반환 지점인 모양인지 사람들이 급격히 적어졌다. 오르는 사람은 나뿐이고, 대부분 내려가는 행렬이었다. 많은 순간 너른 길 위로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이었다. 산속에서 고립 아닌 고립을 경험할 수 있었다. 잠시는 무서웠으나 금시에 자유로웠다.


  사방이 새하얀 설산의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너른 산이 나를 넉넉히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야호 소리를 질러대며 묵묵히 산행을 이어갔다.

  묵묵히 걷다 보니 3 관문의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지금이야 길이 가다듬어져서 이렇게 걸으면 그만이지만 그 옛날 험준한 산세를 뚫고, 호랑이나 도적떼를 피해 과거길에 올랐을 옛사람들을 상상하게 됐다.

  험준한 산세도 뚫고, 도적떼와 호랑이도 요리조리 잘 피했어야 할 텐데. 문제는 이 모든 난관을 넘어간다 하여도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청운의 꿈을 이루는 길이 이다지도 험준하다니.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은 없는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걸어야만 하는 때도 있는 법이겠지.

수옥폭포의 정경

  인적 드문 산길을 끊임없이 걸어 올라가다 보니 이제는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비로소 하산길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원하게 내리치는 물소리가 들린다.

  수옥폭포는 문경새재의 시작점에서는 가본 사람도 없고, 갈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그저 멀기만 한 목적지였는데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딛다 보니 어느새 눈앞의 풍경이 되어 있다. 그랬다. 어쩌면 버킷리스트라 불러도 좋을 문경새재 넘기를 완료한 것이다. 하루 용기내면 충분한 일을 그간 마음에만 품고 살았구나 싶었다.

문경새재 넘이의 흔적

  시작은 언제나 오직 한 걸음이다. 하나 둘 불연속 걸음이 모여 기다란 선으로 이어지는 광경을 여정의 끝에 도달하니 바라볼 수 있었다.

  빙벽을 바라보며 걷던 한 걸음, 정자에 멈춰 앉아 바람을 맞던 한 걸음, 울려 퍼지는 메아리를 듣던 한 걸음이 모두 모였다. 어느 걸음 하나 빠져서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었음 역시 배운다.

  어쩌면 모든 순간의 걸음걸음을 알아채기 위해 나는 하루를 꼬박 걸어야만 했는가 보다. 누군가는 청운의 꿈을 품고 발을 내디뎠을 그 길을. 뭘 또 걷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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