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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Apr 14. 2024

샤머니즘의 끝에서 나를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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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유난히 사주풀이니 관상이니 신점이니 하는 운세를 많이 봤다. 물론 원래도 가끔 심심풀이로 보기야 했다. 다만 가뭄에 콩 나듯. 한데 올해는 가뭄은커녕 땅이 마를만하면 금세 비가 내려 질퍽해진 느낌이다. 이런 땅에 씨앗을 뿌린다 한들 자랄 새가 있을까 싶은…


  그간의 경험을 털어놓자면 이러하다:

1) 훌쩍 친구들과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가 충동적으로 사주풀이를 보았다.

2) 아무개가 용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얘기하는 바람에 몇 주나 기다려 신점을 보았다.

3) 지인의 소개로 운세와 관상까지 종합해서 보시는 분을 뵈었다.

(참고로 지인은 이렇게 덧붙였다: 점사가 너무 신통해서 점점 매사를 의존하게 되었던 적이 있으니, 소개는 하지만 지나치게 빠져들지 말라.)


  이 업계에서 용하다와 신통하다는 꼬리표가 안 달린 사람이 있을까 싶다만, 용하다거나 신통하다는 말에는 괜히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탓에 귀가 팔랑이지 않을 재간 역시 없었달까. 그리하여 나는 인생에 대한 미신적 빅데이터(?)를 수집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나의 경험담을 듣던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사주와 관상, 신점까지 그야말로 ‘샤머니즘 삼관왕’을 달성했다며 놀려댔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곤 ’맞네’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깔깔 웃으면서, 애먼 친구 등을 두드리다가, 불쑥 생각한다.


  그런데, 어째서, 무엇 하나 명쾌하지가 않은 거지?




  그래서 나는 탐구하기 시작했다. 근본적으로 사주를 대체 왜 보았는가를. 살인사건에서 범인의 발자취를 뒤쫓듯 질문을 되짚어 본다. 질문들은 단순했다. 과거 아니면 미래였다. 벌어진 일이라면 이유를 알고 싶어 했고, 벌어질 일이라면 주의를 하고 싶었으니까.

  그렇다면 이토록 과거와 미래를 캐묻는 까닭은 무엇인가. 결론도 간단했다. 모든 물음은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판처럼 한 곳을 향했다.


  ‘저… 어떻게 해야 잘 삽니까!’


  상담이 끝난 뒤면 늘 갸우뚱했다. 과거의 일은 관점에 따라 맞기도 아니기도 해서 아리송했고, 미래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확인할 재간이 없었다. 꽤 구체적인 시점을 들었다고는 해도 어찌 알겠는가. 대체로 5월에는 꽃이 많이 핀다는 말은 나도 할 수 있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의 충만감‘이 날아드는 시공간이 따로 있다고 기대했나 보다. 그래서 굳이 굳이 점사를 보았나 보다. 돌이키면 뭘 그렇게까지 많이 봤나 싶기는 한데…


  좌우지간 말씀들이 각기 다르니 누가 누가 용했고, 신통했고, 적중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이 말은 곧 무슨 말이든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이 말은 곧, 다소 허망하게도, 모든 건 결국 하기 나름이란 얘기도 된다.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의 불분명한 틈바구니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다만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결국 샤머니즘의 끝에서 찾은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질문들은 다음과 같았다: 더 공부를 한다면 뭘 해야 좋을지, 결혼은 하는지, 외국에 나가 살지는 않는지, 동생들과 나이가 들어서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지, 건강 차원에서 유념해야 할 부분은 없는지 등등… 그러면 선생님들은 ’예/아니오‘의 대답과 함께 유려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의 내가 어떤 목적과 태도로 하루를 쌓아 올리는지야 말로 삶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물론 운이라는 게 없다고 생각진 않는다. 어쩌면 정말 소름 끼치게 들어맞는 점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하여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묻는가? 가만히 들여다보니 흔들리는 마음이 보였다. 어제와 내일에 대한 하염없는 물음 속에는 그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 마음만이 있었다.


  돈도 결혼도 건강도 좋다. 그런데 이들이 무엇을 위함인고 하면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위함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삶의 충만감과 행복은 어디에 있나. 곰곰이 들여다보니 게네는 과거나 미래에는 없다. 어제와 내일 사이의 덜컹거리는 오늘이라는 교량 위에만 있다. 그 교량 위에 서서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어떤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를 자문해 보니, 비로소 ‘내 나름’의 평안이 윤곽을 보인다. 온갖 점사를 통해 찾아내고 싶던 근원이 이다지도 가까이에 있었다.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도 아주 작은 씨앗의 뿌리 내림에서 출발하듯, 삶 역시 언제나 자신의 중심에서부터 창조된다. 나로서 잘 살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나로서 잘 살기 위한 방편을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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