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으면, 봄이 되지요
유년 시절의 방대한 기억 중 하나로 흙을 파 먹던… 아니, 흙을 파 내던 경험을 꼽을 수 있겠다.
떠올려 보면 늘 3월 무렵이었다.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엄마는 산으로 들로 홀홀히 떠나곤 했다. 작은 과도, 그리고 검은색 비닐 봉다리만을 채비로. 나는 호기심이 많고 체력은 남아돌았다. 엄마를 따라다니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는 뜻이다. 슬렁슬렁 걷다가 적당한 장소에 이르면 엄마는 거룩한 땅에 피어난 냉이를 채취하기 시작한다. 내 눈엔 죄다 똑같다. 그러나 엄마 눈에는 뭐가 다른가 보다. 용케 냉이만을 쏙쏙 뽑아낸다. 이런저런 시늉 끝에 나 역시 풀떼기를 얼마쯤 자랑스레 내어 놓는다. 하지만 엄마는 고개를 좌로 우로 저을 뿐이다. 검은 봉다리로 입성하기가 이렇게나 어렵다. 몇 번의 시도 끝에야 주어지는 합격 봉다리! 뒤늦게 냉이를 캐내는 비방을 깨우친다. 다름 아닌 ‘코’로 찾기. 냉이의 향은 무척 고유하고 또렷하다. 풀뿌리를 한 번 훑으면 단박에 냉이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봄 내음이라고 하면 냉이의 향내부터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이제는 허리를 굽히면 아프기 때문에 냉이를 캐는 일에는 영 시큰둥한 어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냉이의 향기를 애정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나물 코너에서 냉이를 마주치면 유난스레 반갑다. 봄의 전령이나 다름없으니까. 고로 봄이 오면 냉이를 꼭 먹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직접 캔 냉이의 진한 향취에는 비할 수 있겠냐만, 시판되는 냉이에도 역시 지나온 계절의 정취는 묻는다. 그러니 봄의 장터에서 냉이를 만난다면… 어찌 배기겠는가. 가득 담아야만 홀가분한 것도 있다. 오직 봄이라는 이유로.
그렇다면 냉이를 어찌 먹을까.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향긋한 김밥으로 말아낼 수 있고, 된장국으로 끓일 수 있고, 무침으로 먹을 수도 있다. 다만 올해는 좀 이색적인 시도를 해 봤다. 냉이로 페스토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한식과 양식의 융합이라고나 할까. 페스토를 만드는 방법 자체는 간단하다. 뿌리까지 깨끗하게 손질하는 일이 다소 번거로울 수는 있지만.
1. 메인 재료를 정한다. 예를 들면 냉이. 고수. 바질 같은 식물.
2. 견과류 재료를 정한다. 이를테면 잣. 아몬드. 호두. (견과류는 살짝 볶아두는 편이 좋다.)
3. 약간의 소금, 마늘, 레몬즙을 준비한다.
4. 올리브유는 넉넉하게, 파마산 치즈는 적당하게 준비한다.
5. 1-4의 재료를 몽땅 섞어서 갈아낸다. 깨끗하게 소독한 유리병에 담고, 올리브유를 한번 더 둘러 마무리한다.
페스토라면 역시 ‘바질 페스토’가 가장 유명하다. 이걸 한국식으로 약간 변형하면 바질을 제철 나물들로 대체하면 된다. 그러면 상당히 특색 있는 페스토가 탄생한다. 제철 나물에는 오직 그 계절에만 맡을 수 있는 독특한 향취가 있게 마련인데, 페스토는 이를 담아내기에 좋은 조리법인 듯하다. 그리하여 봄을 맞이해 뚝딱 완성한 냉이 페스토. 활용도는 단연 만점이다. 뜨끈한 밥에 얹으면 봄 내음이 물씬 풍기는 냉이 리소토가, 파스타에 섞으면 고소한 냉이 파스타가 된다. 다른 요리에도 얼마든지 잘 어울린다. 삶은 계란, 구운 고기나 생선, 야채, 심지어 치킨에도 알맞다. 맛도 맛이지만 온몸에 ‘여기 봄이 왔소’하고 소문내는 귀여운 기분을 만끽하는 것은 덤이다.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니 봄을 보다 여러 방면으로 즐기게 된다. 냉이의 향과 봄이 오는 감각이 견고하게 연결된다. 봄이 오는 것도, 냉이를 맛보는 것도 오직 이 계절에 한정된 큰 기쁨임을 배우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식의 시도를 자꾸만 하다 보니 이제는 맛집보다도 제철 식재료를 찾으러 바깥을 향하게 되는 것도 같다. 늘 이런 건 아니다. 소문난 맛집을 방방곡곡 찾아다니는 즐거움은 또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다만 이제는 내 입맛을 가장 잘 알아주는 최고의 맛집이 언제나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수고로우나 건강한 일상과 돌발적이나 특별한 일탈의 균형점을 음식으로도 찾는가 싶은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