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헤르미온느의 모래시계가 있었으니
산타의 존재는 믿지 않으면서 호그와트의 존재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영혼을 하나 알고 있다. 그 애가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부엉이가 물어다 줄 호그와트 입학 통지서를 몹시 기다렸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무색했다는 것도 나는 안다.
그 애가 11살이 되었을 때 정작 마주한 것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우편함이었다. 시시때때로 우편함을 열어 보아도 특별한 소식은 날아들지 않았다. 다만 오지 않는 편지에 대한 의문은 금세 해소됐는데, 외국은 9월부터 학기가 시작되니 9월이나 되어야 편지가 오겠거니 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9월이 되었다. 여전히 편지는 오지 않았다. 다만 이 물음 역시 금방 풀렸다. 외국은 만 나이를 따지지 않던가. 그러니까 참된 의미의 11살이 되려면 내년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났고, 또다시 9월이 됐다. 이제는 소식이 들릴 때가 되었다. 물러설 핑계도 더는 없었다. 어두컴컴한 시간이면 괜스레 창밖의 나무들을 살펴보았다. 어쩔 땐 밤 산책을 틈타 괜히 으슥한 곳을 기웃기웃거리었다. 그러나 부엉이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이지.
이쯤 하면 호그와트의 존재를 부정할 만도 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특이하게 ‘내가 외국인이라서 또는 머글이라서 입학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구나’하는 정도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뿔싸. 호그와트를 부정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외국인인 것도, 머글인 것도, 슬프지만 사실이 아닌가.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린 끝에 그녀가 도출해 낸 결론은 이랬다: ‘부모님이 마법사가 아니면 자식도 마법사가 아닐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자식은 매우 낮은 확률로 마법사일 수도 있다. 우리 부모님은 마법사도 아니고, 지금까지 내게서 마법사의 낌새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종합하면, 나는 아무래도 머글인 듯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호그와트에 갈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딱히 저항할 수 있는 운명도 아닌 성싶었다. 그러니 이왕 다니던 초등학교나 잘 다니기로 한다. 다행히 초등학교 생활이 무척 재미있었기에 상심은 별로 크지 않았다.
그렇게 이 순진무구한 어린이는 커서 내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내게는 호그와트를 믿지 않는 일이 믿는 일보다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해리 포터 세계의 짜임새는 무척이나 정교했고, 공고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실 세계의 빈칸이야 말로 어딘가 허술하고 채워 넣기가 곤란했다. 반면 마법 세계의 공란은 얼마든지 상상력을 피워 채울 수가 있었다. 상상력엔 힘이 있다. 거칠게 뚝 끊긴 단면을 부드럽게 이어 붙이고, 앞뒤가 맞지 않던 내용을 설득력 있는 맥락으로 잇는다.
더욱이 내가 영영 발 디딜 일 없을 케냐의 골목길이라거나 아이슬란드의 목장 같은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한다면 호그와트가 없을 이유 또한 없는 것이었다. 내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이 분명 있을진대 상상력으로 풀어냈을지언정 이토록 생생하고 선명한 시공간이 없을 수가 있나. 역시 있음보다 없음을 부정하기가 쉽다. 사실 지금도 호그와트가 아주 없다고 생각진 않는다. 다만 그 위치가 ‘지구상‘이 아닌 나의 ’마음속‘이라는 차이 정도는 생겼지만.
그토록 해리 포터에 과몰입했던 내게 가장 진한 인상을 남겼던 것은 다름 아닌 ‘헤르미온느’이다. 야무지고 당찬 헤르미온느는 모범생이면서도 그렇게 꽉 막힌 캐릭터는 또 아니라서 해리와 론과 제법 다이내믹한 말썽도 피운다. 수업은 수업대로 모조리 소화해 내면서 교우 관계까지도 놓치지 않는 헤르미온느. 생각해 보면 그녀야 말로 ‘갓생’의 시초이자 원형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유년 시절 내 롤모델을 꼽자면 헤르미온느처럼 뭐든 다 술술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헤르미온느의 스케줄에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포인트들이 있다. 이를테면 1교시는 약초학 수업을 듣기로 되어 있는데, 그녀의 시간표엔 1교시에 점성학도 듣는 것으로 적혀 있달지… 나중에야 그녀가 같은 시간에 두 개 수업을 들을 수 있던 이유가 밝혀진다. 그렇다. 헤르미온느에게는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모래시계가 있던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사기템(?)이 또 없다. 유사 기술로 손오공의 분신술이 있다. 헤르미온느1은 약초학 수업을 듣는다. 헤르미온느2는 점성학 수업을 듣는다. 헤르미온느3은 해리를 만난다. 등등등… 생산성에 미친 사람이라면 저 모래시계를 탐을 안 내고 배길까. 하지만 머글의 세상에선 그런 식으로 시간을 재생반복할 수는 없고, 있는 시간을 쪼개 쓰는 방법뿐이다.
그렇게 헤르미온느의 사상에 잔뜩 감화된(?) 채 성장해 버린 나는 실로 시간을 쪼개 쓰는 것에 빠져든 생활을 얼마간 하기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영어 공부를 하고, 출근, 퇴근 후 일본어 회화 수업을 들으러 가고, 필라테스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격주로 꼬박꼬박 독서 모임에 참석하고, 주말엔 도예를 배우러 가는 식이었다. 당시 내겐 모래시계도 없었는데 어찌 그 많던 스케줄을 다 소화해 내며 살았나 싶다. 동시에 오늘의 바지런함 역시 어느 정도 그 시절에 빚지고 있는 것도 같고.
하지만 해리 포터의 세계에서 헤르미온느는 결국 시간을 되돌리는 모래시계를 반납한다. 1시간의 값어치는 역시 1시간일 때 가장 빛나는 것이므로. 하루를 빼곡히 산다는 것과 진짜 깊이 있는 생산성은 동의어가 아니다. 그나저나 아니라는 사실을 꼭 겪어보고야 아는 것은 마법사나 머글이나 똑같나 보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저런 생활도 맛봄직은 하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스스로에게 맞는 양과 태를 찾아나가는 과정으로 놓고 보자면, 모든 순간은 아름다운 한 때로 꽃 피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