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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Aug 06. 2021

평행 우주의 나

현명하게 오늘을 이겨내는 법

  대학교 수업 시간에 하루는 몹시 존경하는 K교수님께서 수업은 않으시고, 학생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물어오신 적이 있다. K교수님은 철저한 수업으로 정평이 나신 분인데, 그날은 교수님도 조금 농땡이가 피우고 싶으셨나 보다. 하여튼 수업 진도도 뒤처지지 않았고, 급할 것도 없어서 1번부터 제각기 느긋하게 ‘앞으로 무슨 인생을 살고 싶으며 이유는 무엇입니다’ 하고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동기들 머릿속에 저런 생각들이 있었다니, 감탄스럽기도 하고 사람이 달리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듣고만 있다 보니 금세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 걸까. 사실 크게 고민할 것도 없이, 명료했다.


“저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구체적인 목표들과 야심 찬 포부들을 뚫고서 어쩐지 철학적인 것도 같고 허무맹랑한 것도 같은, 나의 또렷한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친하게 지내던 동생 하나가 “역시 누님…!” 하며 나를 치켜세우는 것도, 놀리는 것만 같아 조금 부끄러워졌다. 반면 교수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며, “오, 후회하지 않는 삶. 그거 쉽지 않은 건데,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라고 물어오셨다. 나는 이유를 곰곰이 떠올리다가 답했다.


“지금까지 인생을 돌아보면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요, 지나고 보면 그게 또 다른 걸 경험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었거든요. 그러니 뭐가 되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저는 먼 훗날 늙어서도 이런 마음이고 싶어요. ‘아,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를 남기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한 선택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 적어놓고 보니 제법 그럴싸해서 스스로가 좀 멋지게(?) 느껴지는 걸? 꿈보다 해몽 같긴 하지만. 좌우간 동기들도 오, 하며 박수를 짝짝짝 쳐 주었고 교수님도 부드럽게 나를 격려해주셨다. 당연히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고. 물론 그 이후로 현재까지도 숱한 시련은 존재해 왔고, 순간순간에 후회를 안 할 수만은 없는 때도 더러 있었다. 인간이란 괴로운 상황만 되면, 과거의 선택과 그 선택을 한 나 자신을 탓하기 급급해지고 마니까. 현실의 나는, 제가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변할 수 없는 과거의 나에게 죄를 잘도 덮어 씌운다.


  장강명 작가는 ‘5년 만의 신혼여행’에서 괴로운 순간을 모면하는 현명한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드러낸 바 있다.


“나는 대신 수많은 평행우주에 있는 장강명을 상상한다. 식사를 한 뒤 사무실에서 졸음을 참으며 바로 오후 업무를 해야 하는 장강명. 아니면 너무 바쁘거나 돈이 없어서 제대로 끼니를 때우지도 못하는 장강명.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지 못한 장강명. 말썽쟁이 자식들에게 시달리는 장강명. 그들의 불행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행복해진다. 모두 허구이지만, 이 행복감은 실체다. 허구라는 건 정말 굉장하다. 우주 몇십 개를 새로 만들어내는 데에도 별 힘이 들지 않는다.”


  나보다 나은 누군가를 보며 좌절하고, 나보다 못한 누군가를 보며 위안 삼을 것이 아니라 평행 우주 속의 나를 상상하면 된다. 그렇다. 후회하지 않기란 생각보다 간단하다. 지금의 나보다 더 잘못된 선택(?)을 했을, 더욱 괴로울 수도 있었던 평행 우주의 나를 만들어 상상하며 안도의 대상으로 삼으면 되니까. 이건 심지어 도덕적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워, 죄책감도 안 생긴다!


  한편,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도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평행 우주 속의 좀 더 나은, 더 행복한 나. 뭐, 그렇다고 해서 꼭 오늘을 불행이라 여길 필요는 없지. 그건 그거대로 지향점으로 삼아 나가는 걸로. (본격적인 정신 승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오늘의 삶과 과거의 선택에 너무 연연하지는 말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뿐이지, 후회할 일은 되지 못하니까. 쌉싸름한 경험은 언젠가 건강한 양분이 되어줄 것을 의심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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