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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Nov 22. 2021

내 멋대로의 이타심

극과 극은 통한다

  중학교 2학년 때이던가. 나는 한문 부장이었다. 특별히 한문을 좋아한 것도 아니면서 어쩌다 한문 부장을 맡았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딱히 누가 시켜서 했던 거 같지도 않은데.


  좌우간 나름 '부장'이라는 감투 위에는 책무가 잇따르기 마련이니. 여름방학이 끝난 뒤, 한문 부장은 응당 해야 할 일을 했다. 바로 방학숙제 걷기. 당시에 사자성어를 실생활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에 관한 귀여운 포스터를 만드는 게 숙제였다. 하드보드지에 무언가 덕지덕지 붙여놓은 숙제가 태반이었지만, 개중에는 감탄이 나올 만큼 정성을 들인 작품도 있었고 성의가 없다 못해 백지에 가까운 것들도 있었다. 아무튼 하드보드지가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였고 교무실에 부지런히 제출을 하고 돌아와 앉았는데,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놓여 있는 한 장의 하드보드지.


  나의 방학숙제였다. 아뿔싸.


  남의 것들을 모아내는데 정신이 팔려서 정작 내 숙제는 의도치 않게 제출을 깜빡한 것이다. 숙제를 안 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챘으니 망정이지. 나는 화들짝 놀라서 나의 샛노란 포스터를 마음 졸여하며 제출했다. 그래 봐야 한두 시간 차이의 제출인데도 그때는 행여 지각 제출로 감점이나 되지 않을까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일단 나부터 제대로 챙기자"라고.


  이후로 산다는 건, 이기적인 마음과 이타적인 마음이라는 이분법 속 줄다리기라는 걸 번번이 느끼게 됐다. 이기적인 마음이 들면, 왜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 못했을까 하는 마음에 스스로를 질책하다가도. 이타심을 한껏 발현하고는, 왜 나는 실속이 이렇게 없나 자책하곤 했다.

  그랬다. 이도 저도 아닌 우유부단함 속에서 기우뚱기우뚱 균형을 잡는 것은 인생 숙제였던 것이다. 다만  감사한 것은, 경험이란 허투루 쌓이지 않더라는 . 운동을 하다 보면 땀 흘린 만큼 근육이 바로 잡히고, 균형감을 찾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질책이든 자책이든, 정답이든 오답이든 경험은 값졌고, 줄타기의 요령을 늘려갔다. 그렇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경우엔) 마음 편하고, 두고두고 후회 않을 선택이 기준점이 되어 갔다.


  그러다 불쑥 최근에 이타성과 이기성을 나누는 건 하등의 의미가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 일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국어사전에서도 이기심의 반의어로 이타심을 정의 내리고 있는 마당에! 아무리 극과 극은 통한다지만, 반의어 낱말을 실은 동의어라고 주장한다니. 주시경 선생님이 번쩍 눈을 뜨실만한 허무맹랑한 소리일지도 모른다. 어이쿠. 잠깐만요.


  사전에 이기심이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마음'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기심의 말로는 어딜까? 이기심의 궁극적인 지향점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나의 결론은 '행복'이었다. 이기심은 표지판 같은 거였다. 더 많이 행복하고 싶다는 욕망의 길목마다 놓여있는. 그러면 나만 행복하면, 나는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따져 물었을 때. 그렇지가 못했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잘 지키는 일도, 나의 내면의 평화도 행복의 주요한 구성요소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족들, 친구들의 안녕이 없다면 모래 위에 쌓인 성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행복은 위태롭고, 한 번의 얕은 파도에도 쉬이 쓸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십상이다. 근본적이고 단단한 행복이 되기엔 한참 모자라다.


  그래서일까.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에서는 어째서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종들을 제치고 현시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300쪽


  그러니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나의 행복을 빈다. 아프지 않고, 웃을 일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는 이제 그만하려고 한다. 양 발을 나란히 이기심과 이타심의 땅 위에 내딛을 때가 왔다. 다른 이름의 마음이 보기 좋게 뒤섞일 때 비로소 현재라는 선물을 받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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