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영원한 천국』을 읽고
8월 언젠가 교보문고에서 보낸 광고문자를 받았다. 곧 정유정의 신작 『영원한 천국』이 출간될 예정이고 이 책을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구매하면 10%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굳이 교보문고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정유정의 책은 항상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에 당연히 책을 사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작가의 전작인 『완전한 행복』이 평범한 제목을 완전히 배반하는 내용이었음을 떠올리면서(링크) 『영원한 천국』에는 또 어떤 무섭고 살 떨리는 내용이 들어있을지 불안한 마음도 살짝 있었다.
역시나 500쪽이 넘었지만 주말 이틀 만에 다 읽어버릴 정도로 흡인력 넘치는 책이었다. 동시에 ‘스릴러 장인 정유정이 변했나?’라는 생각도 들 정도로 작가의 예전 작품과는 결이 다른 면도 있었다.
사실 스릴러 장인으로서의 명성은 이번 작품에서도 유효하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임경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삼애원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육지와 연결된 쪽은 산으로 막힌 곶에 위치한 노숙자 재활시설이다. 불길한 일이 일어나기에 딱 맞는 환경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유빙이 바닷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올 정도로 눈보라와 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렇게 수상한 배경 속에서 온갖 음모와 폭력, 살인사건 등이 난무하면서 잠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전개가 이어진다. 정유정의 소설을 읽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전작과 비교하였을 때 변화가 있었다고 느낀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이 소설에는 절대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완전한 행복』에는 웬만한 공포영화를 봐도 별로 동요하지 않는 편인 나 같은 사람도 오싹하게 만드는 악인이 한 명씩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살인 등의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 악인으로 볼 수 있는 등장인물은 없었다. 굳이 악인을 꼽자면 칼잡이 정도가 있을 텐데 그 비중은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미미한 편이었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등장인물 간의 사랑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두 주인공인 이해상과 임경주가 각각 경험한 사랑 이야기는 그들이 내리는 중요한 결정의 계기가 된다. 이 소설의 로맨스 부분을 읽었을 때 너무 달달하고 한편으로는 애처롭기도 해서 솔직히 많이 놀랐다. 역시 필력이 뛰어난 작가인 만큼 연애 이야기를 그동안 쓰지 않은 것일 뿐 결코 못 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 장의 제목에는 두 주인공인 해상과 경주 말고도 각 이야기가 벌어지는 공간인 롤라, 삼애원, 드림시어터 등이 명시되어 있다. 1장에서 설명되어 있듯이 가상세계인 롤라와 드림시어터는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볼 수 있는 ‘영원한 천국’과 같은 공간이다. 작가는 이러한 설정을 바탕으로 과연 그곳이 진정 ‘천국’인지 질문을 던지며 이 소설은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지막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임경주의 삶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불행한 일들만 생길까 싶다가도 그 상황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극복해 내는 장면을 보다 보면 경외심이 들기도 한다.
처음 읽을 때는 그냥 지나쳤었는데 다시 책을 훑어보다 보니 작가의 주제의식과 밀접해 보이는 장면이 있어 소개하고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물론 자기가 딸 수 없는 저 포도는 어차피 실 거라고 생각하는 여우와 같은 수준의 정당화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을 읽고 나니 나도 상당 부분 공감하게 되었다.
“넌 네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다 알고 싶냐? 나는 모르고 싶다.”
가만히 생각해 봤다. 나도 모르고 싶을 것 같았다. 다 안다면 과연 열렬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열렬하게 산다는 건 내가 인생을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그 존중마저 없었다면 나는 험상궂은 내 삶을 진즉에 포기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