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을 오를땐 내려올 것도 생각하자.
제주에 오고도 벌써 2주의 시간이나 흘렀다
어쨌든 나는 살아가고 있고, 제주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삶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주에 왔고 운동하고, 일하고, 자고, 먹고 하는 일들이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것은 그래도 내가 제주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제주에 있다는 사실은 , 그것이 여행이 아닌 거주의 목적임은 내게 더 열심히 잘 살아야 한다고 다그치고 나를 옥죄는 압박이 되었다.
"한라산에 오를거야"
제주에 오기 전 막연하게 가진 꿈이 있다면, 한라산 정상에서 백록담을 보는 것이었다.
제주에 산다면 모름지기 한라산은 한번 올라가 봐야 하고, 정상에서 각오도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렇지만 지금 내가 한라산을 오르는 이유는 그저 내가 버틸 힘을 구하기 위함이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위함이었다.
전날 미리 옷을 챙겨놓고, 올라가면서 먹을 간식들과 컵라면을 챙긴 뒤 새벽 네시에 일어나 집을 나섰다.
그래도 4월의 남쪽이라고 춥기보단 시원한 느낌이었다.
등산 초보인 나에게 그나마 완만하게 오를 수 있는 성판악에서 성판악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한라산 정상까지 4시간 하산에 4시간 정도 소요되는 총 8시간 정도 되는 코스를 선택했다.
다섯 시쯤 도착한 성판악 입구에는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하기 위해 도착해 있었다.
나는 주차를 하고 산을 오르는 것이니 몸도 열심히 풀어보며, 설렘과 함께 찾아온 긴장을 풀었다.
5시 반부터 산을 오를 수 있기에 탐방로 입구에 먼저 줄을 섰고, 입장에 필요한 QR코드를 준비한 뒤 5시 반의 알림과 함께 직원분들의 안내로 입장을 시작했다.
조용하고 어두운 등산로는 침묵을 삼킨 듯 사람들의 발소리와 떠드는 목소리마저도 조용하게 만들었다.
한걸음 한걸음에 집중하며 8시간의 산행이기에 조심 또 조심했다.
사방이 아직은 어두운 때라 그렇게 발 밑을 조심조심하며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해가 조금씩 나기 시작하며 감춰져 있던 한라산의 나무들과 길, 풍경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햇빛은 나무들이 만들어 주는 슬릿(slit) 사이로 빛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빛을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들어오는 빛들을 보면 살짝 벅차오르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나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고.
한 시간 반 정도 걷다 보면 속밭대피소가 나오게 되는데,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정비를 한 후 출발한다.
화장실이 속밭대피소에서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없기 때문에, 미리 볼일을 봐 두고 오르는 게 중요하다. 안 그러면 난처해질 수도 있기에..
그렇게 속밭대피소를 지나게 되면 그때부턴 경사도 좀 있고, 돌밭도 지나고 하면서 또 1시간 40분 정도 가야 하는데, 가다 보면
사라오름이 있어 체력이 된다면 올라가서 보고 오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난 체력이 되지 않아 올라가지 못했다(사라오름까지도 40분 정도 소요된다)
사라오름은 특히 비가 오고 물이 많을 때 예쁘다고 하는데, 올해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라 다시 한번 한라산에 가볼 예정이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시간과 공간에 방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성판악 코스는 생각보다 완만한 경사만큼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아 오르는 시간 내내 풀과 나무들만 계속 보게 되고, 탁 트인 시야가 나오지 않아 그 시간이 상당히 지루할 수 있는 코스이다.
어쨌든 그렇게 오르고 오르다 보면 어느덧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달하게 되고, 이곳에서 마지막 정비 후 정상까지 가게 된다.
이전에는 컵라면도 팔아서 이곳에서 구매해서 먹으면 되었는데, 지금은 판매하지 않기에 나는 미리 뜨거운 물과 컵라면을 준비해서 올랐다.
이곳에서 배도 채우고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뒤 정상까지 향하게 될 때, 한라산 탐방로 안내에는 진달래밭 대피소부터 백록담까지 쉽다고 표시해두었는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보다 엄청나게 길었고, 힘들었다.
아마도 거의 다 돌밭인 데다가 후반부에는 계단이긴 하지만 끝이 안 보이는 것도 한몫한 것 같다.
하지만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게 되면 드디어 풍광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 모습을 보려고 여기까지 오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된다.
풍경에 취한 뒤 30~40분 정도 더 오르게 되면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마침내 백록담에 도달하게 된다.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도달했구나. 정상을 찍었구나!
엄청난 성취감이 밀려오며, 이곳까지 오르는 순간들을 돌이켜 보며,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백록담을 한참 보고 나서, 뿌듯함을 뒤로하고 이제 하산을 시작하게 되면, 그때부턴 또 다른 싸움이 된다.
원래 산이라는 게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 위험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 한라산도 마찬가지인데,
애초에 등산의 목적이 정상에 도달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순간, 내려가는 것은 예정에 없는 일이 되어버려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내려가는 길은 오르던 시간보다 더욱 길고 지루하고 힘들게 느껴진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그 고통..
그렇게 또 네 시간을 걸어서 내려오다 보면, 다리도 무거워지고, 어깨도 아프고 바닥만 보고 내려오다 보니 목도 아프다.
틈틈이 해주는 스트레칭이 필수이며, 오히려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당이 떨어지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
그렇게 네시간여를 내려오다 보면 결국 마지막엔 처음 시작한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때의 기쁨이 백록담을 볼 때보다 한 10배는 되는 것 같다.
산에 오르고 내려오면서 참 많은 생각들을 하고, 어떤 결론과 같은 것들을 얻었는데, 한 가지는 힘든 시간들이 지나고 편안해지기도 하며, 결국엔 정상에 오르는 것이 인생 같다고 생각하며, 내가 지금 돌밭에 있어도 언젠간 편안해질 것이니 그저 묵묵히 걸으면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과, 또 한 가지는, 내가 정상만 바라보고 하산을 생각하지 않아 엄청난 고통을 받았던 것처럼, 멀리 보고, 장기적인 계획 아래 한 가지씩 해나가야 그다음을 준비하고, 힘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작은 발들이 모여 한라산을 완주한 것처럼, 작은 부분이라도 하루하루 더 좋은 사람, 나은 사람이 되면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 조금 고통스럽고 힘든 일들이 있더라도, 결국엔 잘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저 하루하루 더 좋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내가 한라산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