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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Nov 09. 2016

#45까미노데산티아고-눈이 내렸다

-라바날 델 까미노-폰페라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배낭의 짐을 챙기고 나니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가방안에는 아침으로 먹을 만한 것도 없어 할 일은 없었지만, 해가 뜨지 않아 밖에 나갈 수 없었다. 

할 일이 없어 다 챙긴 짐을 몇 번이고 풀고 다시 쌌다. 혼자 걷는 건 혼자 공연을 보거나, 혼자 밥을 먹으러 가는 일과 어쩐지 비슷하다. 정작 본래 할 일을 하고 있을 때는 혼자인게 아무렇지 않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시간, 그러니까 공연이 시작하기를 기다리거나,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그 순간에 뭘 해야 좋을지 뻘쭘한 것처럼 말이다.  

한참을 기다려 해가 뜨자마자 길을 나섰다. 어제의 냉찜질이 효과가 있었는지 발목의 부기는 조금 가라앉았고 부기가 빠진 자리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산중턱의 라바날 델 까미노에서 다음 마을인 폰세바돈까지는 험한 산길이 이어졌다. 어젯밤 늦게 알베르게에 도착한 사람들의 말로는 밖에 우박이 내린다더니 아침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날씨는 정말 종잡을 수 없었다. 이제 11월 초인데, 맨 처음 길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더웠었는데 말이다.  

일상이 어느 순간부터 빨리 흘러가는 것은, 그러다 여행을 가면 다시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은 뇌에서 기억하는 정보(자극?)의 양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모든것이 새롭고 처음인 어린시절엔 기억할 일이 많아 그 모든 걸 접하고 하나하나에 새로운 반응을 보이다보면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서는 익숙하고 단조로운 일상이 이어지고, 하루에 특별한 사건으로 기억해야 할 일은 점점 줄어들어 점차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고 느껴진다고 했었다. 


여기서 단순히 걷기만 했던 이십일 정도의 길은 마치 일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세한 사건들이 많았고, 그 하나하나들은 그 전의 여정과 비교할 수 없는 양으로 기억속에 남았다. 

매일 일어나 걷고, 밥 먹고, 씻고, 잠자는 생활이 일과의 전부이다보니 외부에 보여줄만한 굵직굵직한 사건이나 다이나믹한 풍경의 변화는 부족한 편이었지만, 오히려 생활이 단순하다보니 만나는 사람이며 걷는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내적으로는 스펙터클한 희노애락의 사이클 사이에서 뛰놀았다. 거의 일년동안 느끼고 기억할만한 감정의 양이라고나 할까. 그런 나의 체감 시계만큼이나 이곳에서의 날씨는 사계절을 모두 체험시켜주기라도 할 듯 변화무쌍했다. 

그래도 그렇지, 11월 초에 눈이라니. 세상에.

사실 일주일 전쯤 일기예보를 보던 A가 곧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고 하긴 했었다. 그때 나는 여기서 눈을 볼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더랬다. 이른 겨울이 보고 싶어, 러시아에서 북유럽을 거쳐 여기까지 왔지만 그동안 눈을 봤던 건 단 한 번 뿐이었다면서.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사실은 나, 눈 엄청 좋아하는데, 한번 쯤은 와줘도 좋을텐데.  

그렇게 기다렸던 눈인데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게 약간 아쉬웠다.  

오늘의 목표는 25Km 떨어진 몰리나세카. 그곳까지 간 뒤에 시간이 남으면 8Km 더 걸어 폰페라다까지 걸어갈 예정이다. 일행이 없어지니 오히려 빨리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에 목표를 잡긴 했지만 가다가 힘들면 일찍 쉴 생각도 있다.  

이젠 뭐, 일행이 없으니까.   


눈 내리는 길을 걸어 도착한 첫마을에서 커피를 마셨다. 내가 늘 보던 사람들, 그리고 A는 아마 어제 이 마을에 묵었을 거다. 어제 오후엔 급격히 날씨가 나빠져, 해도 일찍지는 산길을 더 걸어 다음까지 갔을리 없었다.  

혹시나 그 중 누군가 늦게 출발하는 사람이 있으면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이미 다들 길을 떠나고 없었다.  

커피를 마시고 더 걷다가 크루즈 데 페로를 만났다.  

이곳은 자기가 지은 죄를 상징하는 돌을 먼 고향에서부터 지고 와 이 십자가 밑에 버리고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죄없는 몸으로 산티아고 성인을 참배하러 가자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전정보따위 없는 나, 당시에는 이 곳이 이런 의미인지도 몰랐고 그걸 알려줄 사람도 주변에 없다. 내게는 그냥 여기는 지도에 나와있는 눈 내리는 십자가일 뿐. 오히려 그 다음 마을에서 만난 와이파이 되는 바가 더 반가웠다. 

보카디요와 커피를 시키고 와이파이를 켜자마자 A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시간 전쯤 이 마을에서 보낸 메시지였다. 다리는 어떻느냐고, 자신이 어제 묵은 알베르게가 참 좋았다며 오늘은 폰페라다까지 걸어갈 거란다. 다리는 많이 나아서 잘 걷고 있으며 몸상태를 봐서 어쩌면 나도 폰페라다까지 갈 지도 모른다고 답하며 보카디요를 열심히 먹어치웠다. 

아침부터 커피 두잔과 바게트 한 개 분량의 보카디요. 이 정도면 힘을 내기 충분한 양이다.  

계속 산길이 이어지지만, 눈과 어제 내린 비로 길이 살짝 미끄럽긴 하지만 오늘은 어제처럼 다리가 아프지 않으니 충분히 걸어갈 수 있다.   

라고 너무 자신했던 탓일까. 갑자기 산길은 급경사의 험한 길이 이어졌다.  

아마도 이 산은 이 동네의 등산코스인 듯 싶었다. 우리나라였다면 아마도 산악회로 추정했을 아줌마 아저씨의 무리가 내 반대방향에서 올라오고 있다. 이미 500Km이상을 걸어 찌들 대로 찌든 순례자의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배낭을 메고 밝은 등산복을 입고 간식을 챙겨먹으고 떠들썩하게 산에 오르는 무리를 보자 부러웠다. 저 사람들은 한나절 산에 올랐다 내려가 차를 타고 집에 가겠지. 집에 가면 따뜻한 침대도 있을테고, 침낭으로 들어가 자는 대신 푹신한 이불을 덮고 잘테고, 내일도 걷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저들이 왠지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자격지심이 들었다.  

실제로는 웃으며 ‘올라’하고 인사해줬을 뿐인데.   


하루종일 산을 넘었는데도 의외로 다리가 많이 아프지 않았다. 산을 오르려다보니 평지를 걸을 때 쓰지 않던 다리 근육을 쓰면서 그동안 무리했던 근육을 오히려 덜 썼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제 정말 다리가 나아가려고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기왕 나을 거였다면 하루만 먼저 좋아졌다면 모두가(?) 행복해졌을텐데 말이다.   

이 정도면 처음 목표 삼았던 폰페라다까지 걸어갈 수 있겠다 싶을 때쯤 몰리나세카에 도착했다. 내 1차 목표였던 지점이었다. 산 속에 표시된 마을인데다 다음 마을인 폰페라다가 도시여서 그닥 기대는 하지 않고 있던 곳이었다.  그동안 들렀던 수많은 산 속 마을과 똑같이 춥고 허름한 알베르게, 동네에 슈퍼같은 것도 하나도 없겠지. 

그런데 이 곳 생각외로 굉장히 예쁘다. 

외관상으로 예쁘고 아늑해보이는 사설 알베르게도 몇 개 보여, 비싸보이지만 여기서 묵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 마을 사진을 단 한장도 찍지 않았는지는 궁금하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동네 슈퍼에 들러 저녁으로 먹을 바나나와 당근, 다시 혼자 걷는 하루를 기념하는 맥주를 한 캔 사서 나왔다. 일단은 어딘가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이곳에 묵을지, 더 걸어갈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뭐 물론, 맥주를 다 마실 쯤에는 여기서 쉴 확률이 70% 이상이겠지만.   

배낭에 당근과 바나나를 넣고 여유롭게 맥주캔을 뜯어 한모금 마시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 배낭을 붙잡으며 영어로  

돈 내놔! 

라고 소리쳤다.   


내용의 긴장감과는 다르게, 장난기가 묻어있는 어투에 고개를 돌려보니 A다. 들고 있던 맥주캔 때문에 허그는 못하고 서로 꺅꺅대며 반가워했다.   

“와, 너 여기에 어떻게 있는 거야?”

라고 물었더니 이 동네의 바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었는데  창 너머로 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왔단다.  

처음 봤을 때는 서로 흥분해 반가워했지만 그렇게 반가운 마음은 채 1분이 가지 못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뭐지 이 자식. 겨우 이만큼 가려고 어제 그렇게 열심히 버리고 갔던 건가’ 

그러면서 다시 얻는 깨달음. 역시 인간이 걷는 속도는 그닥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곧 다시 만날 것을 뭘 그렇게 영원한 이별이라도 하는듯 슬퍼했을까.  


지난 하루를 물으며 걷다보니 이미 몰리나세카를 지나쳐버렸다. 지나친 김에 폰페라다까지 8Km 더 걷기로 결정됐다. 여기 예쁜 마을에서 묵고 싶었는데. 게다가 컨디션이 거의 회복됐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A는 따라갈 수 없었다. 걷다보니 점차 간격이 벌어졌다.

그렇게 폰페라다에 도착해보니 내가 조금 더 걸어서인지 엊그제 아스토르가에서 보고 전날엔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난롯가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낯익었다. 어제 헤어졌던 늘 보던 한국인 무리가 들어왔고 그들과 어울려 같이 저녁시간을 보냈다.

이 알베르게는 레온과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 방이 나뉘어진 구조였다. 자러들어가기 직전 A와 내일 아침에 홀에서 만나 같이 출발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져 각자의 방으로 갔다.  

샤워하며 보니 또 발목이 부어있었다. 앞으로 좀 더 조심해야겠다. 그리고 다음날엔 걷다가 좋은 알베르게를 발견하면 정말로 하루 쉬어야겠다. 어제까지는 A와 떨어지면 안될거 같아 기를 쓰고 붙어다니려 했는데 막상 하루 떨어졌다 만나니 그냥 그랬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란.  


뭐 어찌됐든 이렇게 내 산티아고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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