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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Nov 11. 2016

#46까미노데산티아고-등이 아프다

폰페라다-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조

아침에 홀에서 만나기로 했던 시간이 한참 지나도 A는 나올 생각을 않았다. 늦게까지 자고 있는가 하며 기다리는데 늘 보던 한국인 무리의 한 명이 배낭을 챙겨나오며 말해줬다.  

A형, 10분 전에 갔어요. 오늘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조까지 간다고 전해달래요.

전날 다시 만났을 때 어쩐지 반갑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굳이 입밖으로 얘기하진 않았는데. 나만 그런게 아니라 얘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그래도, 아, 이 자식.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걸까. 이제 좀 화나려고 한다.   



배낭을 들쳐메고 길을 나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둑했지만 이곳은 도시였고, 가로등이 켜져있어 걸을 수 있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새벽부터 바쁜지 그 아침에 문을 연 빵집도 있었다. 하루종일 먹을 빵을 사서 배낭에 넣고 폰페라다를 빠져나가려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등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그대로 길에 주저앉았다.   

내가 짊어졌던 배낭은 14Kg. 이 길을 걷는 배낭의 권장무게는 8Kg이고 10Kg이 넘으면 들고 걷기 힘들다고 말한다. 굳이 그런 말이 없더라도 배낭이 가벼울수록 잘 걸을 수 있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거기에 더해진 문제가 있었는데, 내가 처음 배낭을 고를 때의 고생의 기준은 까미노가 아닌 언젠가 다시 갈지도 모를 히말라야였다. 내려와서는 다시는 산에 오르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으면서 말이다. 

다시 트레킹을가게 될 경우 포터와 내가 나눠질 경우를 대비해 구입한 배낭은 40리터배낭 뒤에 20리터배낭을 연결, 분리할 수 있는 형태였다. 그러다보니 위로 길쭉한 다른 60리터배낭과 달리 높이는 낮고 부피가 컸고, 그렇다보니 무게중심이 뒤로 쏠려 더 무거웠다. 어깨끈도 쿠션이 좋은 것으로 산다고 했지만 인터넷으로 배낭고르기를 배운 꼬꼬마 뉴비에게는 어떤 끈이 더 좋은 것인가를 구별할 눈이 없었다. 그렇게 구매한 어깨끈과 허리끈은 14Kg을 견디기엔 부실했다. 그렇게 잘못된 배낭선택과 과중한 무게로 출발 이후 늘 어깨 통증에 시달리며 걷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목 뒤가 살짝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따끔거리고 아팠지만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늘 어깨보다는 발이 더 아팠고, 최근엔 다리가 부어 그 쪽에 온 신경이 가 있는 바람에 어깨와 등까지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 그리고 신경쓴다한들 맨소래담을 발라주는 것 외에 해결책은 없었다. 

어깨 등 연한 살 부위에 맨소래담을 발라본 적 있는가. 그건 마치 찰과상 위에 물파스를 바른 듯 엄청나게 화닥거린다. 그래서 처음에 몇 번 시도해본 뒤 다음부터는 그마저도 안해줬던 것이었다. 

등의 통증은 다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일단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한다면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 절뚝대며 걸을 수도 없고 팔을 올릴 수도 없다. 허리와 등은 중요한 곳이었구나. 그렇게 중요한데도 그동안 소홀해서 서운한 걸 참고참고 참았다가 불쑥 스스로에게 복수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겨우겨우 근처에 벤치까지 기어가듯 가 앉아 등의 통증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어떻게 손 쓸 수도 없이 멍하니 앉아 겨우 팔을 들어 배낭 안의 빵을 꺼내 멍하니 씹었다.  

오늘 이렇게 혼자 걸을 수 있는 걸까? 이렇게 걷다 마을과 마을 중간에서 다시 등에 쥐가 난다면 그 땐 정말 어쩌지.  

대책을 생각해야 하는데 아무런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멍하니 등을 약간 구부리고 앉아 빵을 씹으며 이제 해가 뜨기 시작하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정말 힘드네, 말고는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그때였다.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마주쳤던 신학생이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며 저쪽 편에서 발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별 뜻 없이, 여전히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침 먹었어요? 빵 먹을래요?

신학생은 옆에 와 내가 나눠주는 빵을 먹으며 물었다. “A형은 먼저 갔어요?”

어쩐지 요즘 낯익은 사람들을 만나면 안부처럼 그 부분을 가장 먼저 묻는듯 싶지만, 네, 걔는 이미 일찌감지 날 버리고 갔답니다. 그러고나니 딱히 할 말은 없어 나란히 앉아 빵을 씹고 있는데 늘 보던 한국인 무리가 지나갔다.  보자마자 옆에 앉으며 내게 묻는다.  

“A가 또 버리고 갔어요?”

벤치에 앉아 얘기하다보니 등이 좀 풀리는 것 같아 다시 함께 길을 떠났다. 그렇게 걷고 나서 5분쯤 지나자 다시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해 어깨끈을 이리저리 조정하고 있을 무렵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배낭무게로 흘러가고 있었다. 까미노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크고 무거운 배낭을 들고 다니는 장기여행자 나, A, 한국인 무리의 막내의 배낭에 대해. 

막내와 A는 이미 일찍 걸어가버렸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나밖에 없었고, 워낙 생김새가 인체공학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형태라 그 가방을 들고 걸으면 무겁지 않느냐고 관심이 집중됐다. 그러다 그 무리의 한 언니가 신학생에게 장난삼아 배낭을 바꿔들어주는게 어떻겠냐고 하자 이 천사같은 신학생 진심으로 자기 배낭과 바꿔메주겠단다. 

그럴 필요없다고 이 배낭은 원래 내가 끝까지 들고 걸으려 했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이 친구도 극구 괜찮다며 하루정도는 바꿔메고 걸을 수 있단다. 정말 미안했고 이게 웬 민폐인가 싶기는 했지만, 그리고 다른 날이었다면 결코 주지 않았겠지만 이대로 걸으면 오늘은 끝까지 못 걷겠다는 생각이 들어 못이기는 척 배낭을 바꿔멨다.  

이 사람들에게 등이 아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때맞춰 도움을 주는 걸까. 까미노의때맞춰 나타나는 도움들은 정말 신기할 뿐이다.  

레온부터 걷기 시작한 신학생의 가방은 6Kg. 그동안 무게와 비교되서인지 깃털처럼 가벼웠다. 등에 뭔가를 지고 있다는 느낌조차 나지 않았다.  역시 배낭은 가벼워야 했다. 어떻게 짐을 싸면 이런 무게가 나올 수 있는지 진심 궁금했다. 있을만한 건 다 있던데.  

배낭을 바꿔멘 게 계기가 되어 신학생과 한국인 무리의 언니들과 하루종일 같이 걸었다. 이 신학생은 순례의 목적으로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단다. 그동안은 혼자서 기도하며 걸었고 일행이 생긴 것은 이날이 처음이란다. 남자지만 여리여리하게 곱게, 참하게 생겼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신학생이었다. 가방을 바꿔메고 걷는 동안 그 여리여리한 신학생은 가끔 힘든 얼굴로 어깨끈을 고쳐 멨고 그 때마다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리봐도 저 신학생보다 내가 훨씬 건장해 보이는데.  

자기는 군제대한지 얼마되지 않았다며 괜찮다고는 했지만, 나도 미안해 계속 먹을 것도 나눠주고 커피도 사줬지만, 이대로는 다시 저 배낭을 들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계속 미안할 뿐이었다. 


마치 처음의 내 까미노처럼 혼자 걷던 길이 여럿이 되었을 때였다. 전날 알베르게에서 만난 15살짜리 독일인 S와 그의 보호교사가 우리 무리에 합류했다. 전날 신학생과 같은 방을 쓰면서 S와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까미노는 고아소년인 S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 왔다고 했는데, 잠깐 걸으며 본 이 청소년은 걷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한다. 계속해서 안 걷겠다, 다리 아프다, 콜라 사주면 걷겠다고 징징대고 있었다. S와 다섯걸음쯤 떨어져 우리와 함께 걷는 보호교사에게, 아이가 이렇게 아파하면 일찍 쉬어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지금은 이렇지만 알베르게에 들어가는 순간 에너자이저가 된다며 그냥 핑계를 대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제 걷는 게 지긋지긋하다는 보호교사는 멀찍이서 얘가 걷든지 말든지 지켜보고만 있고 그런 S를 신학생이 가서 챙겨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우리쪽으로 돌아와 천주교의 역사와 스페인의 천주교, 까미노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줬다.  

참 참한 총각이다. 천상 성격이 성직자다. 걷기 싫다고 징징대던 S도 신학생이 좋은지 어디까지 가냐며 끝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다소 이상한 조합이 된 듯도 싶지만 내 새 일행들은 꽤 신선하다.    


그때였다. 그렇게 걷고 있는 우리에게, 저 멀리 누군가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 얘기와는 관계없지만, 나와 배낭의 슬픈 인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전에도 말했던 듯 싶지만 까미노에 다녀온 다음에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히말라야트레킹을 다녀왔다. 포터와 나눠질 경우를 대비해 샀던 배낭이 유용하게 쓰일 줄 알았으나 역시나, 난 사서 고생이 팔자였는지 포터를 안 쓰고 그 배낭을 그대로 짊어지고 다녀왔다. 

돌아와서는 이제 더 이상 고생하며 여행을 다니지 않겠다며 태어나 처음으로 캐리어를 구입! 했으나 과연....


다음에 또 그런 여행을 가게 된다면 배낭은 아웃도어를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가 추천을 받으며 사야겠다고 다짐하며 운다.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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