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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Nov 16. 2016

#47까미노데산티아고-당신은 귀한 사람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조


예상치 못한 대군단이 되어 시끌벅적 걷고 있는 오후였다. 길가에 있는 창고같은 곳에서 어떤 아저씨가 손을 흔들어 부르고 있었다.  

뭐지? 하며 가까이 가보니 까미노에서 만난 모든 스페인 사람들처럼 스페인어로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무리 중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주의를 집중해서 듣고 있으니 비노(와인)라는 단어가 들린다. 역시, 아는 단어는 들린다니까, 라며 뿌듯해했지만 문장의 전체는 와인을 사 마시라고 호객을 하는 건지, 그냥 마시라는 건지. 다들 멍한 얼굴로 아저씨를 바라보자 창고안으로 불러 방명록을 보여줬다.  

허름한 노트에 쓰여있는 방명록은 이 곳을 들러갔던 사람들이 남겨놓은 글이었다. 방명록의 글을 조합해보면 아마도 이 아저씨는 와인을 시음해볼 것을 권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감사합니다와 Thank you, Gracias(고맙습니다)가 가득한 걸 보면 아마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인 듯 싶다. 다들 경계를 풀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 와인을 얻어마셨다.   

아무 거나 다 가져다 늘어놓은듯 싶으나 나름 정돈되어 있는 창고는 정겨운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스페인어도 노래도 낯설지만 익숙한 기분이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는데도 다들 어깨너머로 주워들은 스페인어 단어를 토막토막 말하는데도 그냥 즐거울 뿐이었다. 그날 내 무리는 워낙 대군단이었던데다 한국 사람들의 흥과 스페인 사람들의 흥은 여러군데서 통하는 게 많았는지 창고 안 분위기는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보통은 와인을 시음하고, 혹시 마음에 들면 사가는게 전부인 듯 싶었으나 아저씨는 와인을 마시고 돌아가려는 우리를 붙잡고 버섯을 볶아주고, 창고에 쌓여있는 사과를 나눠주고, 그 뒤 농장에 우리를 데려가 무화과까지 따줬다. 

우리 역시 각 나라에서 가져온 기념품을 선물로 주고, 음악을 틀고, 먹고, 마시고, 한참을 각자 나라 말로 떠들다 겨우 헤어져 나와보니 한시간도 훌쩍 넘어있다. 헤어지면서도 아저씨와 작별의 포옹을 몇 번이나 했는지.  

아침엔 등이 아파 걷기를 포기할 뻔 했는데 바로 도움의 손길이 주어지고, 이렇게 떠들썩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다니 정말 상상치도 못한 선물을 받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렇게 여럿이 걷고 중간에 한참을 놀다보니 평소만큼 속도는 나지 않아 목적지인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조까지는 4시가 넘어서 도착했지만 말이다.  

이 마을의 알베르게는 두 개였다. 첫번째 알베르게가 허름해보여 고민하다 다음 사설 알베르게로 향했다. 이곳에서 묵겠다는 S와 보호교사와는 헤어질 시간이었다. 신학생 덕에 하루를 편하게 왔던 보호교사는 계속 신학생에게 너희는 내일 몇 시에 출발하느냐며 내일은 어디까지 가냐며 물었다. 아마 같은 알베르게였다면 산티아고에 갈 때까지 계속 함께하고 싶은 눈빛이었다. 

이 동네까지 와있겠다던 A는 없고, 와이파이를 켜니 이 마을에 너무 일찍 도착해 다음 마을로 가겠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요 며칠 이런 관계에 너무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이날의 여정이 즐거워서였는지, 서운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저녁엔 신학생을 따라 동네 교회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 이 길을 걸으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끔 저녁때 미사를 드리는 알베르게도 있었지만, 미사가 있다 참여할 사람은 몇시에 어디로 가야한다라는 안내정도이지 강제사항은 아니었다. 가끔 한번쯤은 미사에 갈까 싶기도 했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엔 마음이 내키지 않곤 했었다. 

저녁을 빨리 먹어야 미사에 갈 수 있다며 서두르는 신학생에게 일요일도 아닌데요?라고 묻자 성당은 월요일을 제외한 저녁시간에는 매일 예배가 있단다. 그래서 그동안 매일 걷고, 알베르게에 도착해 씻고, 저녁이 되면 미사를 드리러 동네 성당에 가면서 이 길을 걷고 있었다고 했다. 

같이 가지 않을래요? 하고 묻는 신학생에게 다시 물었다. 이건 여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궁금했던 거였다.  

“교인들은 예배드릴 때 카톨릭이 아닌 사람이 미사포도 쓰지 않고, 어떻게, 뭘,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채 들어가서 구경하고 있으면 기분이 나쁘지 않나요? 뭐, 신성모독 당했다는 느낌이 든다든지.”  

관광지화 되어버린 성당엔 나 말고도 워낙 관광객이 많으니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들이 예배드리는 시간에 들어가게 된다든지, 관광객이 잘 가지않는 성당에 가게 된다든지 할 때는 늘 이래도 되는가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서 성당 분위기가 좋아 오래있고 싶어도 혹시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사진도 되도록 찍지 않고(그래서 내 여행사진 중 성당 내부 사진은 몇 장 없다) 되도록 짧게 구경하고 나오곤 했었다. 원하는만큼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내게는 그들의 종파를 존중해주는 행동이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번쯤은 미사에도 들어가 볼까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방해가 될까 싶어 그동안 꺼리던 거였다.   

신학생은 이렇게 답했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우리나라 교회나 절에 외국인이나 믿지않는 사람이 와서 구경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해보니 우리 교회에 낯선 사람이 들어온다 해서 그것을 침입이라든지, 신성모독이라든지 하는 걸로 받아들이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함께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함께 밥을 먹은 사람들도 다들 따라 나섰다. 신학생은 카톨릭이 아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미사를 설명해주겠다며 인도해갔다. 


그렇게 성당에 도착했는데 알베르게에서 알려준 미사시간이 틀렸는지 예배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문이 강대상 옆 맨 앞에 밖에 없어 결국 예배 중간 온 교인의 시선을 받으며 뒷자리로 가 앉았다. 신학생은 낮은 목소리로 지금 이 기도문은 어떤 의미인지, 이 절차가 끝나면 어떤 절차가 이어지는지 설명해줬다. 

그가 설명해 준 평화의 인사 시간이 되자 교인들이 고개를 돌려 서로에게 반갑다고 인사했다. 예배당을 채운 할머니들이 따뜻하게 미소를 지으며 스페인어 한마디 하지 못하는 우리를 반겨줬다. 

평화의 인사가 끝나고, 영성체를 나눈후 신부님이 마지막 기도문을 읊는데 낯익은 단어들이 나왔다. 알베르게니, 페레그리노(순례자)니, 까미노 데 산티아고니 하는 말들. 이건 예전에 그라뇽의 기부제 알베르게에서도 들어본 기도문이다. 다함께 모여 저녁을 나눠먹던 그 곳에서 저녁식사 전 4개국의 언어로 된 기도문을 각 나라 사람에게 주고 돌아가면서 읽게 했던 그것. (그 기도문과 관련한 내용이 궁금하면 여기에.. https://brunch.co.kr/@struggleinearth/37)

영어권 국가의 대표로 기도문을 읽었던 A의 옆에서 무슨 내용인지를 어깨 너머로 보니, 어두운 길에서 빛이 되어 주고, 저녁이면 알베르게를 찾아들게 해주고, 순례자가 길을 잃지 않고 노란 화살표를 따라 잘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무사히 잘 걸어 산티아고까지 도착하게 해달라는 순례자들에게 축복을 비는 글이었다. 

예배가 끝난후에도 사람들은 우리에게 낯모를 언어로 뭔가를 말하고 (아마도 축복을 빌어주고는) 예배당을 떠났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신학생은 신부님이 우리를 보고 특별히 이 기도문을 읽어준 것 같다고 얘기해줬다. 최근에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이 동네 사람들에게 순례자들은 여전히 귀한 존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아무렇지 않게 나눠주고, 선뜻 도움을 주고, 낯 모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축복을 해주는 거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든지,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을 그냥 의미없는 듣기좋은 소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그 말을 들을 때도, 혹은 그 말을 할 때도, 진심을 담아 하고 들은 기억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비록 순례의 목적으로 걷는 길도 아니었고, 낯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을 거라고 상상해본 적도 없어 어색하긴 했지만 신학생이 말해준 ‘우리는 모두 귀한 존재’라는 말은 그 날 기도문과 함께 오래 오래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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