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내가 이스탄불에서 묵었던 호스텔은 구시가지와 인접해 있는 좁고 높은 건물이었다. 양 옆으로 늘어선 카페트 가게와, 여행사, 기념품 가게 사이에 아주 작게 걸려있는 간판을 의심하며, 어둑한 복도를 따라가면 짧은 복도 끝으로 햇볕이 들지 않는 리셉션이 나왔다. 1층에는 작은 리셉션이 전부.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도 마찬가지였다. 한 층에 도미토리 방 하나와 계단과 이어지는 좁은 복도가 전부인 7층짜리 호스텔은 객관적으로 시설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싼 곳이었다.
아마도 한국인들이 그리 많이 오지 않는 곳인지, 거의 8일 정도 묵는 동안 한국 사람들은 두 사람 정도를 봤을 뿐이고 일본인,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 불가리아인 등 꽤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싼 호스텔이어서 기대도 없었고, 가격에 맞는 불편함 정도는 감수하러 들어간 곳이었지만, 와이파이를 1층 리셉션과 7층 부엌 겸 홀에서밖에 쓸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또 웬만한 필요한 것은 다 갖춘 곳이었다. 마치 노래처럼, 있어야할 건 다 있고 없는 건 없는 공간이랄까.
그동안 여행지에서 만났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와이파이의 노예였다. 심심할 때면 침대에 멍하니 있거나, 책을 읽거나, 같은 방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친구가 되기 보다는 각자의 전자기기 앞으로 파고들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호스텔은 꽤 귀찮은 구조를 하고 있었다. 와이파이가 되는 장소가 딱 두군데 뿐이라니.
1층 리셉션에는 의자가 몇 개 없는데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앞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은 건물 꼭대기의 부엌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침이나 저녁때면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드는 어두컴컴한 그 곳에서 누군가는 음악을 틀고, 한쪽에서는 물담배를 피고, 무규칙하게 놓인 소파와 의자에서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앉거나 누워 각자 자기의 스마트기기를 바라보며, 전자기계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 기괴한 얼굴로 있곤 했다.
이른 저녁으로 케밥을 사와 와이파이를 하며 먹어치운 나는 잠이 오기 전까지 이곳에서 적당히 있다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친구는 참 독특한 포스를 풍기며 나타났다. 아무렇게나 주워입은 듯한 스웨터와 청바지를 걸치고 약간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누가 들어도 영국식 악센트로 ‘안녕’하며 들어온 그 친구는 주머니에서 아무 것도 꺼내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안녕, 넌 어디서 왔니, 어디에 들러 여기까지 왔니와 같은 사소한 이야기를.
몇몇은 경계하는 얼굴로, 몇몇은 익숙한 얼굴로 대답을 하며 그의 주위엔 한무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실로, 요즘의 호스텔에서는 볼 수 없는 캐릭터였다.
예전, 그러니까 와이파이도 자동로밍도 되지 않던 시절의 호스텔에서 주로 보던 캐릭터랄까.
문가 구석자리에 앉아 아무 생각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나는 갑자기 나타난 이 신선한 캐릭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내 오랜 버릇 중 하나였다. 북적거리는 곳에서 없는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주변인을 관찰하는 것.
곧 이 친구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 고프다며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부엌안의 사람들마다 다가가 동행을 끌어모으던 그는, 내게도 다가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이미 먹었다며 고맙다고 얘기해주고 다시 폰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 친구는 뒤이어 '너는 어디서 왔니? 어딜 다녀왔니?'의 질문으로 그를 중심삼아 만들어진 무리 안으로 나를 끼워넣었다.
넌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에 ‘코리아’라 대답했더니 무리 중 누군가 백번 넘게 들었을 질문을 했다.
‘북쪽 아니면 남쪽?’
이젠 그 질문에 좀 질리기도 해 웃으며 대답해줬다.
‘남쪽, 그런데 너네 북한에서 온 애들 본 적이나 있니?’
그러자 그 무리들 술렁이며 토론을 시작했다. 자기는 북한에서 온 사람을 본 적 있는데 걔네들은 여행을 못한다느니, 막 보디가드를 수십명씩 데리고 있다느니.
그러다 또 무리에 새로운 사람이 끼고 내게 넌 어디서 왔냐고 물어 ‘코리아’라 대답해주면 옆에서 자기들끼리 ‘사우스’라고 덧붙여줬다.
어라, 이 무리 좀 재밌잖아하는 얼굴로 또 관찰하고 있는데 누군가 강남스타일얘기를 했고, 싸이가 어쩌느니하며 자기들끼리 한참 얘기하다 나를 바라보며 그게 맞느냐고 확인을 구했다. 그러다 한마디 툭 던져주면 그걸 가지고 참 잘 논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애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다들 어느나라에서 이곳에 왔는지,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은 어디인지, 어떤 방법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사람 수만큼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프랑스에서 히치하이킹만으로 이곳까지 왔다는 프랑스인에서부터, 그냥 여행 왔으나 이스탄불이 좋아 여기 한동안 머무르며 영어를 가르치며 돈을 벌어 그걸로 지내겠다는 영국인, 전세계를 여행중인 뉴요커와, 일본인, 불가리아에서 자주 버스타고 여행온다는 불가리아인까지. 이스탄불에 오는 방법은 정말이지 수없이 다양했다.
그렇게 같이 놀며 좀 친해진 사람들. 아까 밥 먹으러 가자던 이 사람들은 나가지 않고 한참을 수다를 떨다가 다시 내게 제안했다. 우리는 이집션 바자르에 갈 생각인데 너도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시장에 떠들썩하게 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함께 길을 나섰다.
이집션바자르에 가기 전에 먼저 밥부터 먹으러 간 이 무리. 처음 내게 말을 걸었던 친구는 영국에서 온 T였는데, 이스탄불이 좋아 여기 한동안 그냥 머무르고 있다고 했었다. 그때가 이미 몇달이 지난 상태였고, 돈이 떨어져 직장을 구하는 중이라고. 몇달째 이스탄불에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관광지에 가지 않았고, 대신에 호스텔 근처의 사람들과 같이 놀며 지내고 있었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하며 들어 넘겼는데, 그 말의 위력은 거리로 나서면서 느낄 수 있었다. 가는 길 내내 T의 친화력이 빛을 발했다. 지나가는 가게마다 혹은 지나가는 사람마다 T의 이름을 부르며 껴안고, 큰 소리로 반갑게 웃으며 십년지기처럼 인사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무리를 만들어낼 때도 잠깐 느꼈지만 이 친구 굉장한 사람이었다.
자주 가는 곳이라며 익숙하게 사람들을 데리고 간 식당도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 로컬 음식점인지 근처의 식당보다 반절정도 쌌다. 이미 배가 불렀던 나는 이 날은 음료수를 마시고 오는 길을 잘 기억해뒀다 다음날부터 줄창 드나들었는데 음식도 맛있었다. 이 친구 굉장한데,의 마음은 이스탄불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밥을 먹고 역시 T의 인도에 따라 이집션바자르에 들렀다.
그러나, 이스탄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이 친구도 허점은 있는지 시장은 거의 문을 닫는 중이었다. 하지만 밥도 먹었겠다 수다도 한참 떨었겠다 기분이 좋아진 일행에게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을 연 몇몇개의 상점에서 물건을 구경하고 터키시딜라이트라고 불리는 엄청나게 단 로쿰을 사 먹으며 세상 그렇게 신난 적이 없다는 듯이 수다를 떨었다.
극단적으로 단 것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그나마 덜 달아보이는 프레첼 비슷한 질감처럼 생긴 도넛 같은걸 사서 나처럼 ‘터키의 단 것은 너무 달아’란 얼굴로 로쿰을 거절하고 있던 뉴욕에서 왔다는 K와 나눠먹었다. 그러나 겉의 프레첼 비슷한 질감은 페이크. 반으로 가르자 그 안엔 설탕액이 강처럼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 터키 먹을 것들의 극단적인 단 맛이란.
아마도 단 것을 먹어 애들이 더 흥분상태가 됐던 건진 모르겠지만 이들은 문 닫은 시장 앞에서도 근처 바닷가에서도 참 잘 신났다.
근처가 떠들썩하도록 웃고 수다떨며 몇 시간을 그대로 둬도 잘 놀 것 같았다.
걸어 지나는 장소마다 누군가는 이곳에 다녀왔다고 여기는 참 좋다고 말하고, 또 다른 곳을 지나가다가는 여기가 별로라고 투덜거렸다. 한 장소마다 각자의 경험담과 추천 코스가 이어졌다. 이스탄불 이틀차인 내게는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바닷가를 산책하고 돌아다닐 땐 보스포루스 해협을 유람하는 배가 있는데 굉장히 멋지다며 여행사에서 예약해 타는 건 비싸고, 여기에 있는 배가 제일 싸다며 추천받았다. 덕분에 ‘I have no plan’을 외치고 다니던 내게도 다음날 계획이 생겼다.
그렇게 식당이 늘어선 거리를, 이집션바자르를, 갈라타다리와 보스포루스 해협의 주위를 걸었다. 밤의 거리는 낮과는 또 다른 색으로 다가왔다. 낯설지만 정겨운 기분.
낯 모르는 거리인데도 왁자지껄 떠들고 놀며 돌아다니니 어쩐지 한국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밤에 무리지어서 놀러다니는 일은 한국에서만 할 줄 알았었는데 말이다. 그러고보니 어쩐지 낯익었던 우리 호스텔의 어둑한 부엌은 한국에서 자주가던 가게같기도 했다.
그렇게 이스탄불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