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전날 밤의 떠들썩한 산책에서 내일은 보스포루스에서 페리를 타야겠다는 계획이 생겼다. 내일 할 일이 생겼으니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며 기뻐 잠들었지만, 일어나 보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기껏 할 일이 생겼는데.
아마, 숙소위치와 관계없이 아무데나 제일 싼 숙소를 예약하고, 비오는 날에도 페리를 타고, 쨍쨍한 날에 하루종일 박물관을 구경하던 여행초반의 나였다면 아마 보스포루스 행 유람선을 탔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오가는 교통비용과 시간을 생각하면 조금 더 비싸더라도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곳 근처에 숙소를 잡는게 더 경제적이라는 것과, 비오는 날 페리를 타면 비와 바람을 맞아 더럽게 춥고 시야는 예쁘지 않다는 걸. 맑은 날은 야외, 비오는 날은 실내라는 단순히 생각해도 명확하기 짝이 없는 법칙조차 경험하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나였다니.
오랜만에 생긴 다음날 계획이었는데 물거품이 되었다며 조식을 먹고 있을 때였다.
전날 저녁 함께 이집션바자르에 다녀온 K가 말을 걸었다. K는 뉴욕에서 이곳에 여행 온 청년이었다. 나도 그도, 한 무리에서 바로 도드라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별로 눈에 띄는 인상은 아닌데다, 거의 안면인식장애에 가까운 내 얼굴 못 알아보기 능력까지 합쳐져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기 쉬웠을 그는 다행히 기억에서 떠올랐다. 어제 시장에서 함께 설탕액이 줄줄 흐르는 과자를 나눠먹었던 사람으로.
그렇게 희미하게 기억속에 남아있던 K가 너는 어디에 갈 거냐고 물었다. 원래는 보트를 탈 예정이었지만 비가 와서 뭘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너는 어디에 갈 예정이냐고 물었더니 이 친구도 마찬가지란다. 그러면서 밥을 먹으며 주절주절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며칠 일찍 이스탄불에 도착했던 K는 머무르는 내내 계속 비가 왔단다.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딱 하루 멎은 것이 바로 전날. 그러니까 내가 처음 이스탄불을 관광하며 '여긴 맑고 선선하구나, 이곳은 날 환영하고 있어'라고 멋대로 생각하던 날이었다. 여기 날씨가 지긋지긋하다며 밥을 먹는 내내 투덜대던 K는 다 먹어갈 쯤엔 오늘 같이 돌아다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뭐 역시, 보트계획이 사라지고 나서 특별한 계획은 없었던 나는 따라나서기로 했다. 어차피 어딜 가나 새로운 곳이기에 어디를 가도 상관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나서 어디에 갈 거냐고 물었더니 그랜드바자르에 들러볼까 한단다.
바자르라는 단어가 붙은 곳은, 그러니까 어제 갔었던 이집션 바자르나 오늘 가려는 그랜드 바자르는 시장이었다.
그랜드 바자르는 앞에 그랜드가 붙은 그 이름 그대로,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시장이라고 한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후에 두어번 더 이곳에 가긴 했는데 한 번도 같은 곳을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오기 전에 봤던 가이드북에는 여기엔 온갖 종류의 매장이 있어서, 사고 싶은 모든 것을 구경할 수 있다고 했었다. 그 크다는 시장을 찬찬히 구경하고 싶었지만, 늘 들어갈 때마다 헤매다 늘 처음 보는 매장을 보고, 어리둥절한 상태로 다니다 어느 순간 시장 밖으로 방출되어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시장 밖으로 나와보면 어떻게 헤매고 돌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늘 처음 보는 길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짐작도 가지 않는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나름 내가 생각하는 구시가지의 중간지점인, 술탄아흐멧자미(블루모스크)가 어디냐 물어 거기까지 간 후에 다시 길을 찾아가곤 했었다.
함께 밥을 먹고 길을 떠난 아직 서로 잘 모르는 두 사람.
전날 저녁에 함께 다닐 때는 몰랐는데, 아침부터 이 친구 엄청나게 말이 많았다. 함께 걸어다니면 90%정도 혼자서 속사포처럼 얘기를 하다 내 동의를 구하고 몇 마디 대답해주면 다시 한참을 얘기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거 너무 예쁘다, 난 이렇게 반짝거리는게 좋아, 이런거 사가고 싶지만 난 덜렁거리니까 돌아가면 다 깨져있을 거야, 그래서 못 사, 그런데 블루모스크 모형은 기념품으로 사가고 싶어, 깨지진 않겠지? 터키 음식은 너무 달아. 그래서 여기 사람들이 저렇게 살이 찐 것 같아, 그런데 나 이 앞에서 사진 찍어줄래? 너도 찍어줄까? 라는 식으로 말이 끊이지 않았다.
내 새동행은 말이 많은 사람이구나, 라며 걷고 있는데 K-팝과 K-드라마에도 관심이 있는지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음, 그런데 확실한 건 이 친구는 나보다 훨씬 많은 한국 TV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아이돌도 드라마도 이 친구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심지어 한참을 수다를 떨며 그랜드바자르에 도착할 때쯤엔 이 친구에게 한국드라마 추천을 받고 있었다.
그랜드 바자르에 가기 전 뭔가 살 것이 있는가 생각했다. 이제 집에 돌아갈 때가 거의 다 됐으니 이제는 슬슬 기념품을 사야했다. 그리고 얼마전부터 열광하기 시작한 터키시커피를 한국에서도 끓여먹기 위해 체즈베라는 주전자를 사고 싶었다. K는 얼마전 결혼한 친구 선물을 사고싶단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간 곳은 로쿰을 파는 곳.
돌아와서도 왜일까 생각했지만, 이곳의 단 것들은 너무 달았다. 평소에 먹는 설탕양이 한 스푼이라면 여긴 열스푼쯤을 한꺼번에 털어넣는 기분이었다. 어디서나 쉽게 마시는 애플티도 달고, 슈퍼에서 산 초코과자는 초코가 더 달 수도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달았고, 로쿰은... 그냥 설탕을 응축시켜 놓은 듯한 단맛이었다.
아직은 터키에 온 지 얼마 안 됐고, 입맛은 단맛에 적응되지 않았는데, 계속 돌아도 돌아도 로쿰만 계속 나오고 상인들은 자꾸 달아 죽겠는 로쿰을 권하고, 몇 개를 집어먹었더니 입안이 설탕에 절여지는 것 같고, 여기로 가면 체즈베가 나오겠지하며 걸었는데 시장 밖으로 나가있고, 다시 들어와 걸어도, 이번엔 램프코너, 이번엔 가방코너와 같은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여기 너무 크다.
어찌어찌 매장을 찾아 체즈베의 가격을 물어봤는데 이건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이지만 얘네가 나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구나의 느낌이 드는 가격이었다. 적당히 깎다 살까?하고 멈칫하는 순간이었다. K가 나서 이건 너무 비싸다며 흥정을 붙이고, 다른 곳에 가보자며 나를 끌고나오고 있었다. 이 친구 생각보다 야무진 면이 있었다. 나중에 내가 더 돌아다니며 가격을 묻기 귀찮아 내 기준으로 적당히 깎아 물건을 샀을 때도, 가게밖으로 나와 딴 데가면 더 싼 것도 있을지도 모른다며, 더 깎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내 물건도 K의 물건도 산 뒤에 이제는 시장밖으로 나갈 차례였다.
아까까지는 시장 안을 돌아다니고 싶었는데 자꾸 본의아니게 시장 밖으로 내뱉어졌다면 이제 시장을 나서려는데 밖으로 나가는 길을 못 찾겠다. 자꾸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도는 듯 싶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술탄아흐멧자미를 물어 겨우겨우 나와보니 생뚱맞게 이집션바자르가 나왔다.
이게 왜 생뚱맞냐면, 내가 묵었던 호스텔을 기준으로 왼쪽길로 걸어 15분 가량 걸어야 내가 나온 이집션바자르의 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25분 가량 걸어야 처음 들어간 그랜드바자르 문이 나오는데, 분명 이집션바자르와 반대방향으로 걸었던 우리가 나와보니 이집션바자르 문 앞에 있었던 것이었다.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우리는 할 일이 없었으니. 그리고 이집션 바자르의 문 앞엔 바다도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싶었지만 어차피 갈 곳 없는 우리들은 내친김에 엊저녁에 산책했던 갈라타다리 근처 배를 띄워놓고 파는 고등어 케밥을 사먹었고, 여기서부터 숙소까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며 가, 긴 낮잠을 잤고, 저녁쯤 부엌에서 만나 내일은 보스포루스 유람선을 타자며 의지를 다지며 와이파이를 하다 저녁이 되자 또 어디선가 휘적휘적 나타난 T가 밥 먹으러 가자고 해 셋이 함께 저녁을 먹고 돌아와 오래 잠을 잤다.
내일은 맑아서 유람선을 탈 수 있길.